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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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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질구질하게 살아봐?


BY 영원 2003-10-01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엔 ‘토요병’이라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요즘 한창 유행인 ‘로또 복권’을 사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지는 병. 발표날인 토요일만 되면 이 토요병이 절정에 이르러 발병한다. 토요일만 되면

“복권 안 샀는데 만약에 내가 찍어둔 번호가 맞았으면 어떡할래? 그 땐 껄덕대지 마라. 알긋나?”남편은 협박하듯이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친정 엄마의 따끔한 한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돈을 꾹 움켜쥐고 절대 풀어주지 않는다. 우리집 재무장관은 나기에 복권을 사기까지는 최종적으로 나의 결정이 내려져야 돈이 집행되어질 수 있다. 

“얘! 그 복권 살 돈으로 반찬이나 더 사라.”

친정 엄마의 우스개 소리가 어찌나 가슴에 절절하던지. 복권 살 돈 달라는 남편에게

“그 돈으로 반찬이나 더 살거야!”하고는 친정엄마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전해주었다. 그래도 꿈쩍도 않는다.


요즘 돈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진 나는 재테크 동호회도 가입하고 복권 살 돈으로 재테크 관련 책자도 4권이나 구입해 정독하고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던가. 남편도 덩달아 재테크 책에 관심을 보였다. 평소 그냥 막연하게나마 재테크에 관심은 있었기에 그 책이 남편의 눈길을 끌었나 보다. 며칠동안 그 네 권의 책들을 나보다 더 열심히 보더니 행동의 변화가 나타났다. 그 토요병의 주범인 ‘복권’얘기가 쏙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는 나보다도 더 열정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지?”

“정말 구질구질하게 살아야만 되나?”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그리고 며칠 뒤 퇴근하고 와서는

“우리 과일 장사할래? 투 잡으로.”

“차로 하는 장사?”

“응. 봉고로 차 바꿔서 회사 쉬는 날마다 장사할까?”

“...”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봉고를 살 것만 같았다. 그런 열정에 나도 탄력받아 지금보다 더 알뜰한 살림을 잘 할 자신감이 솟구치는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고 자신감이 솟구칠 때 행동에 옮겨보려고 당장 신용카드 사용과 할인점 가는 횟수를 줄이고 모든 살림살이를 ‘아껴쓰기’에 돌입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어 첫 결과는 아주 좋았다. 나름대로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고도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 ‘비자금’이라는 몫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

살림에 재미가 생겼다. 집 때문에 얻은 대출금에 억눌려 경제적인 살림의 재미를 전혀 못 느끼고 살았는데 본격적으로 나서니까 늘어나는 저축은 없어도 줄어드는 대출금의 자리수를 보니 희열이 느껴졌다. 이런식으로만 한 2,3년 고생하면 여유로운 생활로 돌아설 것 같다.


그러나 희열도 잠시 허리띠를 졸라맨 지 한 달만에 커다란 변수가 생겨버렸다. 뜻하지 않은 빚이 ‘턱’하니 생긴 것이다. 시댁의 빚을 우리 가족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어버려 지금 가지고 있는 만큼의 빚이 또 생긴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우리 가족은 홧김에 외출을 했다. 평소 좋아하던 할인점으로 들어서 아무 생각없이 눈이 가는 것은 모두 카트에 넣었다. 결제는 일시불로 신용카드 계산하고 집에 돌아와 사 온 음식들을 아무 말 없이 먹어댔다. 스트레스 해소 차원이라고나 할까. 한 달간의 공이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었다.

‘구질구질하게 살면 뭐해! 어차피 이렇게 되는데.’라는 생각에 괜스레 한 달 동안 노력한 게 억울했다. 속상한 맘에 음주를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도 밤새 잠이 오질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 술김에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못 해 봤던 상스런 말들을 마구 허공에 퍼부었다.

아침이 되어 남편은 뜬 눈으로 장롱에 기대어 주절주절거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미안해”한 마디하고는 출근해 버렸다. 밤새 눈에 힘을 주고 있어서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한 4시간 정도 자고 나니 아주 상쾌했다. 순간 그 빚도 있고 남편과의 서먹함도 잊은 채 평소처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언제 와? 저녁 먹고 올거야?”

“응? 으응. 아니! 집에서 먹을께.”

“알았어요. 이따 봐요”

코맹맹이 소리까지 섞어가며 통화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서야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아차’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오히려 더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항상 그런 식이다. 내가 단순해서인지 싸우고도 순간순간 그 사실을 잊어버려 웃으며 넘어가곤 한다. 어제처럼 심각한 일도 순간의 건망증으로 무너져 버린다. 나에겐 유용한 건망증이라고나 할까?


남편과 저녁먹으며 어제의 일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는 서로 다독거리며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 보자고 결론을 냈다. 평소 장난이지만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차리는 남편이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굽히는데 나라고 목을 뻣뻣이 할 수 없어 다시 구질구질하게 살아보기로 동의했다.


뒷감당은 버겁지만 일이 해결되고 나니 맘은 후련했다. 그 다음 날 난 오랜만에 복권을 한 장 남편몰래 사서 서랍장에 감춰뒀다. 토요병의 발병은 아니고 간간히 이렇게 복권 한 장으로 1주일을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지내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큰맘 먹고 구입했다.

설거지를 하며 ‘당첨만 되면 일단 빚부터 갚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얼마씩 떼어주고...’ 1주일 뒤 혹시 생길지도 모를 즐거운 상상을 하며 혼자 실실 웃었다.

이런 즐거움은 구질구질하게 살 때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에 맘껏 즐겼다.


“당첨만 대봐라. 국물도 없다. 카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