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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의 추억


BY 다정 2003-09-12

단풍잎의 추억

  아침 출근길이다. 지각할까봐 조바심을 내는 발걸음과는 달리 마음은 도로변에 늘어선 단풍잎을 향한다. 벚꽃의 거리라고 불리는 육영재단 앞을 지날 때였다. 바람에 나부끼다 살풋이 내려앉은 노란 단풍잎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앙증맞은 모습이 어린 시절 그 맑고 투명했던 크레용의 노랑빛깔을 띠고 있는 게 아닌가! 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냥 한참을 들여다보다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을 걷다 수첩을 꺼내  갈피에 소중하게 넣었다.
  그 순간 가슴이 찔리듯 나의 시선을 끄는 빨간 단풍잎 나무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훅 치미는 뜨거움과 함께 가슴속에 오래 간직되어온 편지 속의 단풍잎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이십 오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그 날의 열정처럼……
  '아씨, 설악산의 첫 단풍잎에  내 마음을 실어 보내오. 주말이면 늘 혼자서 등산을 한다오.'
  편지 속에 설악산의 고운 단풍잎을 보내준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다시 만나 오랜 우정을 나누다가 한 때 연인이기도 했던 사이다. 또한 '아씨'는 고등학교 시절 그의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일기장에 '아씨'로 지칭된 나의 호칭이다.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 꿍꿍 앓던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나에 대한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하교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지던 일을 시작으로 그와의 만남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 아지랑이가 졸음처럼 피어오르던 기찻길 논두렁에 피었던 자운영 꽃들을 바라보며 꾸었던 꿈들은 어디에 흩뿌려져 있을까!  파란 하늘과 초록 풀밭에서 행운을 바라며 찾던 네잎클로버,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서로 질세라 읽었던 그 많은 소설책과 철학 책의 언어들이  현기증처럼 너울거린다.
  초여름을 알리는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별빛을 벗삼아 인생이 무엇인가 많이도 고뇌하였다. 가을날, 흐르는 물위에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에 눈길을 준 채 나누었던 침묵의 대화들은 깊은 우물이 되어 심연 속에 자리잡고 있다. 달빛에 어리는 겨울바다의 불빛과 파도소리에 섞여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던 자작시를 읊던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진지하고 침울스럽게 하였는지 아스라한 기억 속에서 한 점 불빛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그와 나는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로 때로는 고민을 들어 주는 상담자로서 잘 어울렸던 사이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는 시간과 정이 정비례 관계라던가. 흐르는 시간과 함께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통행금지 시간 직전까지 다리가 아프도록 걸었던 때는 이미 우정이 아닌 연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은행 취직과 동시에 속초로 발령 받아 떠나고 그 빈자리는 늘  허전했다.
  이별은 항상 그리움을 배가시킨다고 하였다. 시외전화를 통해서 들려오는   "잘 지내니?"
  한 마디 말에서도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불면의 밤을 보내기가 부지기수다. 망망대해의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나를 생각했다는 편지를 받으면 가보지도 못한 동해바다를 함께 거니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주말이면 자전거로 강릉경포대, 낙산사 등을 찾아가 띄우던 엽서의 글들을 외우다시피 읽고 또 읽으며 지냈다. 언젠가는 함께 그곳에 가보리라 마음도 먹었지만 다른 사람과의 인연이 맺어진 후에 가보았으니 삶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달이 밝으면 다리가 아프도록 거리를 헤맨다는 사연에는 가슴이 저렸고, 호반의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이라는 글에서는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하였다. 새벽녘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베껴 보낸 시의 구절들이 입가에서 맴돌기도 한다. 나를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기차를 갈아타고 새벽같이 달려왔던 그 정성이 귀한 감정이라는 걸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새삼스레 느낀다.  마음과는 달리 퉁명스레 대했던 이중적인 행동의 미숙함과 미안함까지도 귀하게 생각되는 것은 삶의 무게일까? 빛 바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감회에 젖듯 어느 것 하나 소중하게 기억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순간 단풍잎의 선명한 빛깔, 바라볼수록 애절하게 호소하는 듯한 표정이 내 젊은 날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추억은 채색되어 빛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문득 그립고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한 번쯤 싸늘한 가슴에 촛불을 켜 두는 게 아닐까싶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눈길 멈추는 어느 한 곳에서 되살아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것, 그것 자체도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고운 빛깔로 물들었던 단풍잎도 찬바람과 함께 낙엽이 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머잖아 느낄지라도 출근길의 이 짧은 순간을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