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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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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변명***


BY 철걸 2003-09-15

딸애가 평소에 갖고싶어 하던 "쥬쥬"라는 인형의집 선물세트를 받고 폴짝폴짝 뛰면서

연신 아빠의 넓은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좋아하고 있다.

혹 다섯번 하고도 한해가 더지난 올 결혼기념일 에는 아련히,잡힐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가(선물따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심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누라에겐 그흔한 장미꽃 한송이도 없이 웬 뚱딴지 같이 딸애 선물이람...

 

그랬다.

이유가 있었다. 정작 결혼 기념일 선물을 받아야할 아내인 나대신 딸애가 선물을 받은데는..

뭐 이렇다할 추억거리도 없이 우리는 작년 이맘때 다섯번째의 결혼 기념일을 맞이 했었다.

남편은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로 무슨 무슨 날이라고 해서,특별히 가슴 설레게 달콤한

언어로 속삭여 준다든가 어느날 갑자기 꿈속에서나 볼수 있는 멋진 선물 따위로 사람을

황홀케 해준다든가 하는데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 이었다.

첫애는 딸아이를, 둘째는 사내아이를 보았으니 이만하면 나도 99점짜리 아내는 되지 않은가!

이제 중년의 문턱에 막 들어서는 나이이고 보니어찌어찌 해서라도 요번 결혼기념일은 그냥 넘기지 않고 어설픈 으름장이라도 놓아볼 생각 이었다.

좀처럼 나오지 않을것 같은 애교도 부려보고...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고 해서여느때 보다도 남편은 일찍 퇴근을 했다.

남편은 거의 결혼기념일을 잊고 있는듯한 눈치였다.

퇴근하자마자 TV앞에 앉아 무슨 스포츠 중계에 빠져들다시피 하고 있었으니깐..

출근전 그저 정갈하기만한 그의 양복어깨를 털어주고 또 쓸어 주면서

"여보! 오늘 토요일인데다 날씨마저 굉장히 좋다. 꼭 우리 경주 같을때 같지 않아요?"

(우리는 신혼여행을 경주로 갔었다.)

하면서 넌지시 암시를 건넸건만, 여전히 남편은 구식 1인용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TV보기에열중하고 있었다.

멋대가리라곤 없는 남편이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다.

나는 그간 꼼꼼히 짜놓았던  오늘의 스케줄 1단계를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그건 남편이 즐기는 TV 시간대에 우리의 결혼식 비디오 테이프를 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내 예감은 적중 했다.

비록 수동적인 방법이긴 했지만,남편이 일어나서 달력을 보러 가는데까지는 불과 몇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편은 딸애를 부르더니 켄터키치킨을 사러 가자면서 딸애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있었다.

1단계 성공작전에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방안 청소를 하고,양배추를 채썰어

토마토 케찹으로 멋스럽게 모양내어 뿌린뒤 막 식탁위에 올려 놓으려던 참이었다.

남편이 거의 이성을 잃은듯한 큰목소리로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순간 켄터키치킨은 마당에 던져져 포장이 터진 상태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고...

딸애의 발 뒷꿈치에선 시뻘건 피가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딸애는 몹시 놀랬는지 새파랗게 질려서 엄마! 엄마! 하고 울면서 벌벌 떨고 서 있었다.

남편은 차를 운전하고 병원에 가는동안 내내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나는 딸애를 끌어 안고 피가 흐르는 뒷발꿈치를 수건으로 누르면서 넋나간 사람마냥

연신 딸애의 이름만 불러대고 있었다.

눈물은 쉴새없이 흘러내렸고....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 했건만 그날은 토요일 오후고 다음날은 일요일 인지라

모레 월요일에 담당의사가 나와야만 수술을 할수 있다는 거였다.

X레이를 찍고 서너명의 레지던트들이 거의 뒤축이 다떨어죠 나간 딸애의 발뒷꿈치 살덩이를  열었다 닫았다 할때는 정말 미치지 않는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온몸이 오싹 거렸다.

상처에 소독제를 뿌리고 하얀 막대기를 무릎밑까지 대고 붕대를 감을때마다 딸애는

소리소리 지르며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것이었다.

자식의 아픔을 보는 찢어지는 에미의 심정을 어떤 필설로 표현해 낼수 있을까....

남편은 남편대로 무슨 죽을죄 지은 사람 마냥 남편답지 않게 눈물은 보이고 있었다.

연신"내 잘못이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남편은 달력을 보는 순간 결혼기념일 이라는것을 그제사 깨달았더랜다.

그래서 멋적고 미안해서 켄터키치킨 이라도 사다가 가족들과 함께 먹으면서 모처럼 자기

나름대로 그날 오후를 즐겁게 보낼참이었단다.

 딸애를 여느때 처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 오는데

(우리 자전거는 12단 기어 자전거로 내리막길에서는 무서우리 만치 빨리 달린다.)

아빠! 하는 딸애의 비명 소리와 함께 뒷바퀴에 걸리는게 있더란다.

남편이 자전거를 급히 세우고 보니 자전거 뒷바퀴 "살"이 딸애의 발뒷꿈치를

거의 반이상이나  짓뭉겨 놓은 상태 였단다.

(겨울 인데도 딸애는 멀리가지 않는다고 양말을 신지 않고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남편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으면서우리의 다섯번째 결혼 기념일은 그렇게

남편과 나와 딸애의 눈물로 얼룩진 엉망진창인 채로 지나가고 있었다.

두달여 동안의 꾸준한 통원치료(딸애는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고,아킬레스건에

 손상이 있었다.) 결과로 처음에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지도 못하고,걸음도 한쪽발로

 껑충 거리며 뛰고,그이후론 팔자걸음 비슷하게 걷더니만 지금은 거의 일자로 걷는다.

새살도 많이 올라왔고,눈물속의 결혼 기념일 이었던 지난해가 훌쩍 지나고 또다시

그날이 왔지만 왠지 올해는 딸애의 철사로 꿰맸던 그 아픈 자리에 한번더 눈길이 머물고

"딸아이라 흉터가 많이 남지 않아야 할텐데..."하는 안스런 마음만이 든다.

악몽의 다섯번째 결혼기념일로 부터 한해가 지난 지금까지 남편은 내내 딸아이에게

죽을죄 지은 사람마냥 지내 왔음을 나는 잘 안다.

지나간 결혼 기념일 보다 맞이 해야할 결혼 기념일이 더 많이 남아 있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딸아이의 아픈 상처를 떠올릴것이다.

엄마의 속상해 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아이의 웃음 소리가 그칠줄을 모른다.

오늘 저녁엔 남편보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갈비찜을 식탁에 올려야 겠다. 

 

 

 

**MEMO**

10년전 (1993년)  월간지 "여원"에 실렸던 제글입니다.

결혼 기념일 추억 수기에 응모해서 운좋게 최우수작에 뽑혔던 글입니다.

우연히 앨범을 정리 하다가 미처 코팅을 하지 않아  

세월 만큼이나 너덜너덜 해진 몇편의제글을

우리 에세이방 모든님들께 선보일려고 합니다.

짧은글들 이지만 계산이나 가식없이 있는그대로 적은 내용들이니

그냥 재미나게 읽어 주시면 감사 하겠구요..

에세이방에서는 프린트가 가능 하니 복사도 해둘겸 겸사겸사 해서 글 올렸습니다.

 현재 위글의 주인공인 우리 딸내미는 중2학년 이구요.아들내미는 초등6학년 입니다.

딸내미 발뒷꿈치는 숙녀화 올라오는 뒷부분하고 겹쳐서 아무래도 성인이 되면

성형 수술을 해줘야 할것 같습니다.운동화는 괜찮은데,구두는 아프다고 하거든요..

< 2003-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