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서울로 돌아온 후 그 남자와 나는 더욱더 가까이 지냈다.
자주 그의 자취방에서 아침을 맞이했고, 역시 나의 외박은 쉼없는 변명거리들로 뒤덮인 채 그에 따른 타당성을 인정받아가는데 능숙해졌다.
겨울이 지나 그 남자는 취업준비로 바빴다. 점점 그를 보는 시간이 적어져 갔다. 자취방에도 자주 불이 꺼져 있었다. 둘이 자주 가던 곳에 가보아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내 몸에 오는 변화를 감지했다.
식욕이 땡기고 몸이 붓기 시작하는 것이다. 빼먹지 않고 하던 맨스도 소식이 끊겼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의지하고 날 지탱해 줄 이가 절실했다.
나는 사방으로 연락해 간신히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초췌해 있었다.
"오빠... 힘들어?..."
"... 휴... 그래. 친구녀석들은 꽤나 취직했는데 난 좀 어렵다. 그놈의 시위한게 뭐 그리 대수라구... "
그 남자는 무척이나 피곤해 있었고 나는 차마 그에게 내 임신소식을 알릴 수 없었다.
"오빠... 나 사랑해?"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랑하냐구?
훗, 얘가 ... 속 불편하냐? 갑자기 엉뚱한 소리는..."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신 뿜어대는 담배연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제발 담배 좀 꺼. 몸에 해로와."
그는 나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움찔하더니 곧 담배를 비벼 껐다.
"오랜만에 봤다구 바가지 긁냐? 나도 정신없이 바빴어. 졸업하면 돈벌어야 될꺼 아냐. 대학까지 나온 놈이 밥벌이도 못하면 되겠냐? 안그래? ... 그러니까 나한테 짜증내지 말라구..."
"오빠, 나..."
"뭐?"
"실은 할말이 있어. 나 ...큰일 났어."
그의 시선이 내게 꽃혔다. 하지만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연신 테이블에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나... 임신했어... 3개월이래..."
...
뾰족한 무슨 해결책을 원해서 그를 찾은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신상의 변화를 토로하고 싶었고 같이 걱정해 주길 바랬던 것 같다. 책임전가 같은건 필요없다. 그저 앞으로의 대책을 같이 세웠으면 해서...
"진짜야?"
"응."
그는 담배갑에 손을 뻗으려다 거두고 말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그 남자의 음성은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널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거야? 난 아직 학생이야. 남들처럼 취직이 그리 쉬울거 같지도 않구. 넌 졸업하려면 2년은 더 있어야 하잖아.
내가 어쩌길 바래?"
그 남자는 오히려 내게 역정내기 시작했다.
"오빠, 이게 내 잘못이야? 왜 나한테 큰소리야. 난 단지 오빠한테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했구... 그럼 오빤 내가 어쩌길 바래?
나 사랑한다며... 결혼할 거 아니였어? "
쓸데없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슬픈일도 아닌것을... 억울한 일도 아닌것을...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그 남자는 한참 후 말문을 열었다.
"방법은 두가지야.
애를 없애든지... 그럼 일주일 정도 수업에 지장은 있겠지만 그 정도로 빵꾸맞진 않을거구... 두번째 방법은 휴학하구 애를 낳는거야."
그 남자는 냉정하고 담담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나... 장담 못해.
널 사랑하긴 해. 하지만 내 인생도 지금 책임지기 어려운데 널 어떻게 ... 너랑 애기, 그리고 나... 책임지기 어려워. 내가 취직이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 놈의 취직...
너까지 내 숨통을 조여 오는 구나. 응? 왜이리 도움이 안되냐... 응?"
그는 서서히 자제력을 잃어가는듯 했다.
......
왠지 사막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사방은 온통 모래무덤뿐... 어느쪽으로도 발을 내딛을 수 없는...
나는 더 이상 그 남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남자 역시 그후로 나에게 연락하지 않은걸 보면 내심 그래주길 바랬던 것 같다.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아무도 몰래 아이를 지웠다. 잠깐 동안의 수술인 듯 했다. 마취로 인해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을때... 밀려오는 하복부의 고통과 함께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