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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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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13부)


BY 로렐라이 2003-10-07

 13부

 

  학교 진입로를 달리는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나의 내면 깊숙히 숨겨져 있던 그리움을 서서히 끌어올리고 있다.

  아스라히 보이는 붉게 물든 산기슭, 이미 벌거벗어 버린 지 오래된, 까까머리 중의 머리와 같은, 휑한 바람만 넘실거리는 논의 모습......

  진입로 양쪽길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있는 은행나무들의 잎사귀들은 어느새 하나둘 바닥으로 내동댕이 처져 더더욱 쓸쓸함을 자아낸다. 간간히 보이는, 두손을 꼭 잡고서 이미 바닥에 나뒹구는 은행잎을 밟으며,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떨어지려 하는 잎들의 마중을 받으며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이 가을  날 더더욱 괴롭게 만든다.

  벌써 11월이 다 가고 있다.

  안 우석과 이 민주와의 사이에서 나는 어떠한 결론도 쉬 내릴수 없었다. 아니, 내릴수 없었다기 보다는 누군가가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낮에는 안 우석과, 밤에는 이 민주와의 만남을 통한 깊은 혼란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더이상 이대로 지탱해 나갈 수 없음을 안다. 머지않아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결정되어 지리라...

  아... 어찌해야만 하나...

  안 우석에게 사실대로 얘기를 할까? 아니,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내게 얻어지는 결론은?

  그 이전에 정말 내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나서 나의 그러한 마음을 두사람에게 전해야 하지 않을까...

  이 민주...

  이제 11년이 되어간다.

  아니, 그건 중요치 않다. 그는 내 삶에 있어 근본적인 대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 내 11년 가까이의 삶속에서 결코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나만의 시간속에서도, 음악속에서도, 밤하늘 속에서도, 영화속의 장면에서도 그는  항상 날 굶주리게 했다. 만나고 싶었고, 보고 싶었고, 목소릴 듣고 싶었던, 아니, 단지 안부만이라도 알고 싶어했던 그런 그를 ... 비록 무수한 시간과 더불어 그를 향한 그리움은 바래져 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나  여전히 내게 있어 이 민주라는 존재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안 우석이라는 이가 다가오면서 나는 서서히 이 민주라는 존재를 망각하려 했다. 비록 의식적인 노력이였고, 나에 대한 안 우석의 사랑에 대한 책임 비슷한 것에서 부터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로 인해 이 민주라는 존재의 비중이 점점 작아져 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민주가... 다시... 11년 가까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그가, 바로 이 민주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안 우석의 사촌형으로써......

  정말이지... 아... 도망치고 싶다....

 

                                        ************************************

 

  따르릉... 따르릉...

  이미 시계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누가 이렇게 늦게 전화한 걸까...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음... 나야."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이는 이미 술에 흠뻑 취해 있는 듯 했다. 방안이 온통 술냄새로 가득 찬 듯 머릿속이 지근지끈 쑤셔왔다.

  "... 우석씨?"

  "...그래. 나야..."

  "이렇게 밤늦게 무슨일이야?"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아니, 너한테 확실히 해 둘게 있어서, 그래서 전화했다. ... 음. 비록 술기운 땜에 혀가 꼬여 발음이 좀 샌다만 그러나 정신은 말짱해. 그러니까 주정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알았어?"

  왠지 두려운 생각에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대답해. 아니, 그건 그렇고... 지금 나와라. 널 보고 얘기할게 있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와라. 혹 나오지 않는다면.. 밤새 기다릴꺼야. 꼭 나와."

  찰칵

  수화기는 차가운 마찰음을 귓속에 울리며 끊겼다.

  결코 그에게서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 그의 행동은 나를 움추러 들게 한다.

  혹... 알아버린 건가...

  학교 운동장은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안 우석은 위험이 도사리는, 긴장감이 감도는 적진에 홀로 남겨진 듯 보였다. 어두운 베일속에 가리워진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무얼 고민하고 있길래 저리도 침울해 하고 있는 걸까?

  서서히 그가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갔다.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다가갔으나 그는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정말이지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그저께와는 사뭇 다른, 몇일 굶은 사람모냥 초췌하고 빈약해 보였으며 심지어 그의 얼굴이 너무나 안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향해 뻗어나가는 손을 끌어당겨야 했다.

  "우석씨..."

  그는 그제서야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충혈 된 듯 싶다.

  "...옆에 앉아..."

  그와 나 사이...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는 듯 했다.

  "나... 아니, 우리 솔직해 지자. 아주... 아주."

 그와 나 사이의 강을 건너기 힘들것만 같다.

  텅빈 운동장 어둠속 저편에는 거대한 괴물이 살고 있는 듯 한 착각에 잠시 빠져본다. 어둠속에선 바람소리만이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다.

  "난... 난 정말이지... 솔직해 지기를 바래. 아니... 잘 ... 잘 모르겠다. 내가 뭘 원하는지..."

  찬 공기는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술냄새를 머금은 채, 내 약한 위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나를 울렁거리게 하는 것은 앞으로 그의 입을 통해 들려올 것들이 무엇인지를 눈치챘다는 사실이다.

  "나... 어제 저녁 누구 만났는지 아니? 아니 모르겠지... 내... 사춘형. 내가 지금까지 존경해왔던 이 민주라는 인물을 만났지... 훗."

  나의 심장소리가 어둠에 쌓인 텅빈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낼까...잘못했다고 말할까... 잘못? 내가 뭘?

  "넌... 여전히 침묵하는 구나. 그래. 내가 얘기를 꺼냈으니까 끝까지 내가 하지. 넌 내가 묻는거에만 답하면 돼."

  추위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는 간간히 떨림을 동반하며 허공속으로 사라졌다.

  불현듯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저편 어둠속을 말없이 응시하고 섰다.

  도저히 내 입으로 뭔가 말한다는 게 두려웠다. 결코 안 우석이란 인물이 내게 있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기에...  

  "정은아..."

  "..."

  "너... 나 사랑하니? 아니, 난 널 사랑해. 그래.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난 니 포로가 되어 버렸구... 변함없이 끝까지 널 사랑할 거라고 맹새했지. 그러나... 넌 간혹 날 곁에 두고도 다른 무언가에 빠져드는 듯 했어. ... 그래도 널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그런 모든것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졌어.그런데... 지금 나... 혼란스러워."

  그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차게 흔들어 대며 말했다. 아니 절규하는 듯 했다.

  "너... 넌 날 사랑하긴 했니? 날 위한 자리가 네 마음속에 있긴 한거야? 응?"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