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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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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8부)


BY 로렐라이 2003-09-21

  8부

 

  "어머, 지은아. 오늘 네가 왠일이니? 정장을 다하고..."

  평소 청바지에 소탈하게 입고 다니던 지은이가 어느날 투피스의 정장을 하고 나타났다.

  "얘좀봐. 첫인상의 중요성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겠지. 찰 망정 체여서야 쓰겠냐?"

  "아~ 오늘이던가? 우석씨 사촌형과 만난다는거"

  "얘봐라. 아무리 너 짝이 생겼다고 나한테 그렇게 관심없기냐? 서운하다. 서운해. 있을때 잘해라. 혹시 아냐? 오늘 이후로 싱글에서 화려한 더블로 바뀔~지..."

  그때 안 우석이 다가왔다.

  "아 미안. 기다렸어?"

  "응. 아니. 우리도 방금 왔어요. 난 감빡했네. 지은이 미팅. 그 벌로 지은이한테 한소리 듣고 있네요."

  "혼날만 하네. 자 내 얼굴보고 화풀어요. 그건 그렇고 오늘 너무 근사한데~ 평상시에도 그렇게 하고 다녔으면 진작에 짝 찾았겠네~"

  "어머. 우석씨도 놀리는거예요?"

  우린 모두 즐거운 기분이었던 것 같다. 안 우석의 사촌형을 만나기 전까진...

  우리 세사람은 안 우석의 사촌형이 다닌다는 ㅅ대학교로 갔다. 교수님의 논문을 도와드리느라 시간내기가 여의치않다고 해서 학교구경도 할겸 겸사겸사 ㅅ대로 장소를 정했다.

  가을냄새가 물씬 풍기는 교정이었다. 교내 곳곳이 붉은색 계통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미 떨어진 낙옆들이 우리의 발밑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지은이와 나는 이곳에 온 목적도 잠시 잊어버린 채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는 사이 안 우석은 그의 사촌형을 데리러 갔다.

  햇살이 따사로왔다. 붉게 물든 나뭇잎들 사이로 밀려드는 햇살에 우린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때 등뒤에서 우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건물계단을 통해서 두남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한사람은 분명 안 우석임에 틀림없는 듯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은 그가 말하는 사촌형인가 보다.  먼 거리였고 또 햇살이 내리쬐이는 탓으로 자세히 얼굴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아... 멋있다. 나 아무래도 큐피트 화살에 맞은거 같아~"

  흰색계통의 옷이리라.  피부도 안 우석에 비해 하얗고... 그래서 인가...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듯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모습이었다.

  어디서 받더라...

  10년전 교회앞... 그때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 사람도 저런 모습으로 나를 향해 웃고 있었지...

  아.....

  그는 점점 내 시야로 가득 차 들어왔다.

  그런데... 이럴수가...

  그는, 안 우석의 사촌형이란 사람은 10년전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를 하염없이 울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아니,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너무 닮았다... 너무나...

  이미 색바랜 그 사람...이 민주의 인상이 점점 내 눈앞에서 또렷해지고 있었다.

  숨을 쉴수가 없다... 생각할 수가 없다... 이럴 수가...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오던 10년전의 이 민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나는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정은아. 왜그래? 어디 아프니?"

  나의 안색이 창백했던지 안 우석은 어느새 내게 달려와 나를 부축이며 안스럽게 물어왔다. 안 우석의 어깨너머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는 듯한, 10년째 금광을 캐러 곡괭이질을 하던 이가 금맥을 찾은 듯, 한편으론 앞으로의 혼란스러움을 짐작하는 듯한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 괜..찮아.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잠시 현기증이 났나봐. 괜찮아요."

  그제서야 안 우석은 안심했는 지 그의 사촌형을 우리 가까이로 다가 세웠다. 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아... 오빠...

  "자, 서로 소개하죠. 이쪽은..."

  "전 이 지은이라고 해요. 안 우석씨한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말이지 우석씨가 존경한다고 할 만 하네요."

  "과찬의... 말씀을. 우석이가 절 너무 과장되게 소개했나 보군요. 전... 이 민주라고 합니다. 사실..."

  아... 더이상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다만 나의 머릿속에서 윙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 소리만이 내 주변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아무 생각도, 아무 행동도 취할 수가 없다.

  아... 이... 민... 주

  내가 그토록 그리워 했던 이가, 내가 그토록 원망했던 그가, 그가 내 앞에, 그것도 안 우석의 사촌형으로 다가올 줄이야...

  더이상 서 있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안 우석의 도움으로 나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낮의 충격에 나는 자정이 넘어서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 이럴수가...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대답없던 사람이 어떻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