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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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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5부)


BY 로렐라이 2003-09-18

  5부

 

  이미 거실불은 꺼져 있었다. 안방도 역시 불이 꺼져 있는 듯 하다. 단지 오빠 방에서만 컴퓨터를 쓰는지 간간히 자판두드리는 소리만이 문틈사이로 들려온다. 이미 내손엔 집열쇠가 들려 있었다.

  가만히 대문을 닫고서 어두운 밤공기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내 이런 행동들... 결코 술기운 때문은 아님을 안다. 다만 나 역시 이런 내 행동들을 제어할 수 없음을 깨달을 뿐......

  어둠속을 뛰어가며... 건물사이를 뛰어가며... 밤공기를 갈랐다.

  거리는 한산했다. 정말 시간이 늦긴 했나보다.

  24시앞에 누군가가 팔짱을 낀채 어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럴수가...

  내 눈앞에 서있는 남자는 안 우석이 아니었다. 아니... 안 우석이 틀림없을테지만 그러나 지금, 지금 이 순간만은 그가 아니다.

  10년전, 다시는 날 만나러 오지 말라고, 울먹이며 이별을 고해야 했던 이 민주라는 남자였다.

  아... 그가 온 것이다. 이 민주가...

  고3 때야 비로서 그에 대한 나의 무한정 향해가는 그리움과 보고픔을 깨닫고 그를 찾으려 시도했었고, 그로인해 재수시절도 방황으로 끝내야 했으며... 결국 다부지게 마음먹고 삼수를 지내야 했던...

  그런데 그가 이젠 날 찾아 온 것이다. 날 찾아...

  그래서... 그래서 이밤 이렇게 달려나온 것이란 말인가...

  "오빠... 오빠..."

  나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섰고... 환한 웃음과 힘껏 벌린 두팔로 나를 맞이했다.

  "오빠..."

  나는 내 안식처에 몸을 던졌다.

 깊이.. 아주 깊이...

  "오빠..."

 그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10년이란 세월이 허락한 그의 모습을...

  나는 번쩍거리는 24시 간판의 불빛과 가로등의 도움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  아니야. 아니야. 10년전 그가 아니라  아...이 사람은... 안 우석이었다.

  안 우석은 나의 행동에 무척 놀랜  모양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반길거라고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아... 저... 미안해요. 실은..."

  얼버무려야 했다.

  "실은 저희 ... 오빠인 줄 알았어요. 요 몇일 지방에 가 있거든요..."

  나의 무책임한 행동때문에 이미 결혼해서 이시간 쯤이면 올캐언니와 자고있을 오빠를 들먹여야 했다. 그가 이 사실을 나중에라도 안다면...

  "괜히 좋다가 말았네. 난 또... 뭐 처음부터 욕심부리면 안 되겠지... 어쨋든 이렇게 나와준 것만도 어딘데... 고마워. 실은 나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그는 멋적어 했다.

  미안... 미안해요 우석씨...

                                     

                                    *********************************

 

  안 우석과 나는 월미도에 갔다.

 찝질한 바닷내음이 우릴 반겼다.

  이 시간. 이렇게 늦게 이런 곳에 온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인데..

  비록 자정을 넘긴 시간이지만 가로등 불빛아래, 헤어질 수 없다는 듯 진한 포옹속에 몇몇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향해 섰다.

  저 너머 수평선 근처에 보이는 산들... 이미 어둠에 가리워 푸른 빛이 아닌 검은 빛깔을 내뿜는 저 바다의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듯한... 

  "밤바다를 이렇게 정은이랑 같이 바라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치 못했어. 정말이지 너무 좋다..."

  "밤바다가 너무 아름다와요. 밤하늘도... 저 평온한 모습들 처럼 ... 우석씨도... 나도... 우리 좋은 선후배 관계였음 해요... 가능할 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그와 나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다. 비록 어두운 베일에 그의 모습이 가리워 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굳어져가는 표정들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가슴이 저며온다.

  내가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듯이 안 우석도 나를 향한 그리움의 손길을 접지 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특별한...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10년전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아니 너무너무 존경했던, 고개를 떨구지 못하고 한없이 해를 향해 바라보는 일편단심의 해바라기처럼 그렇게... 그렇게 가슴저미게 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닌가 싶어서... 아니, 이 민주의 존재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그 어느 누구도 내 가슴에 품어선 안될 것만 같은...

  혹... 그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잊지못하고 불쑥불쑥 나를 향한 그리움에 애닳퍼하진 않을 런지...

  혹... 지금 이 순간 나를  생각하고 있진 않은지...

  이런 모든것들이 다 부질없는, 한낱 나만의 망상덩이라 할 지라도... 그래도 난 지키고 싶다. 그래야 훗날 길에서라도 그를 우연히 만난다면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 할까... 널 바라보는 것만도 내겐 큰 고통이야. 그런데 더이상 우리 사이를 좁힐 수 없다면... 선후배가 이런 야심한 시각에 밤바다를 같이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 정말 그런 관계를 원해?"

  네. 그래요. 난... 난... 그래요. 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해요. 그것이 앞으로 10년, 아니 그 이상 걸린다 할 지라도...

  내 마음속에서 이런 말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나 내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자신없다는 투였다.

  "우리... 노력해요. 노력하자구... 응? 좋은 관계... 좋은 관계를 갖고..."

  그는 날 거칠게 끌어 안았다. 나의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속에 뭍혀 버렸다. 더이상 그는 내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는 날 더욱 세차게 껴안았다. 내 몸이 으스러지도록... 그러나 그가 내 몸을 세게 껴안으면 껴안을수록 더더욱 이 민주에 대한 나의 죄책감은 커저만 간다. 

  정말, 정말이지 내가 이 사람을 뿌리칠 수 있을까... 정말 이 사람을 선배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사랑해. 정은아... 널 처음 본 순간. 그래, 작년 니가 입학하고 널 기숙사 근처에서 처음 본 순간, 그 순간부터 널 사랑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어. 그후 널 볼때마다 난 너무 행복한 반면 너무 괴로왔어. 혹... 너에게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라는 존재가 더더욱 크게 다가왔구... 도저히 널 향하는 내 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어. 이번 학기 교양수업도 그래서 들은 거야. 널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서... 너의 뒷모습이라도 바라보고 싶어서... 그런데 어느때부턴가 너의 이 긴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졌어. 널 내품에서 웃게하고 싶었어. 널... 내 품에서 잠들게 하고픈 강한 욕구가 지금의 날 만든거야. 그런데... 그런데 나보러 참으라니... 그저 앞으로도 바라만 보라구? 그건... 그건 날 물리적으로 고문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거라는걸 정말 모르겠니?"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허공에 뿌려지고 있다. 밤별들이 하늘에서 내 가슴으로 떨어져내리듯 그의 품에서 나를 향한 그의 애닳은 그리움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였던 팔을 서서히 풀어 나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곤 그의 상기된 얼굴이 내 시야에 크게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성스런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고 있었다.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하얀 눈이 나의 살결에 살포시 내려앉듯... 내 입술에 촉촉히 젖어오는.. 그 무언가가 잠들었던 내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깨우기 시작했고 나의 내부에서는 서서히, 아무 저항없이 그의 그러한 행동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듯했다. 그는 나의 머리, 목, 그리고 나의 등을 서서히 어루만졌다. 부모가 자기자식을 사랑스레 어루만지듯... 포근한 솜처럼 부드러운 그의 품에서 잠들고 싶다...

  아...

  갑자기 캔통이 바닥에 부딫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 나를 감싸안으며 소리난 쪽을 바라보았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