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정은아, 우리 한잔 하지 않을래?"
그날 오후 수업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 그저 잠시,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어보니 저녁이었다. 지은이랑 나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베아트리체'로 들어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무리들과 합세해 우리는 '베아트리체'라는 밀폐된 공간을 연한 보라빛으로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정은아. 누군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건 너무나 행복한 일이야.
그래. 우린 벌써 대학 2년을 마감하고 있다구. 남들은 몇번씩이나 하는, 소위 미팅이란 것도 입학 당시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한번 해보곤 때려치웠잖니.. 너무 후회된다. 솔직히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도, 아니 우리도 남들모냥 미팅같은 거라도 여러번 했음 이 반반한 외모에, 후훗.. 야 줄섰겠다. 아 이렇게 외로와 질 줄 알았더라면 빨리 하나 만들어 놀걸 잘못했어. 그런 의미에서 너 그 안 우석이란 사람. 잘 사귀어 봐. 있을때 잘 해야지.. 오늘 그 사람 무슨 일 치를 기새던데... 그만큼 너에 대한 감정이 남다른거 아니겠니. 그지?"
그래... 지은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목이 말랐다. 긴 얘기는 지은이가 했건만 목은 왜 내가 타는지... 시켜놓은 맥주를 몇모금 들이켰다. 아... 왠지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타는 듯한 갈증. 무엇으로 부터 비롯된 것인가...
밤늦도록 지은이는 신세한탄 비슷한 것들을 풀어 놓았고 나는 계속 맥주를 들이켰다. 하나 둘 사람들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9시가 넘은 듯...
우리는 집 방향이 달랐기에 일찌감치 헤어졌다. 그리곤 서로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이 행동들... 무엇을 위한 몸부림인가... 무얼 위한...
사랑.
정말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내게... 내게 또다시 가슴설렘의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두렵다. 안 우석이란 남자... 그리고 ... 정말 두려운 것은 ... 내 안에 아직 살아 존재하고 있는, 순간순간 날 당혹케 하는 10년전... 수화기 저편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던.. 이 민주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존재... 그의 안부... 그의 현재 변해있을 모습들... 그가 갖고 있는 나의 기억들... 10년이란 세월의 공백을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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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여보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안 우석이라는 학교 선배인데 정은이 있으면 바꿔주시겠습니까?"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은이?"
"네. 어쩐일이신가요?"
"...니 목소리가 듣고싶어서...술 마셨니?"
"네... 오랜만에 친구랑 몇잔 했어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아쉬움과 그리움이 짙게 깔린 듯한 깊은 한숨소리가 왠지 날 무겁게 짓누른다.
"지금... 뭐해요?... 훗, 지금은 나한테 전화 거는 걸테고 방금전까지 뭐 했어요?"
"귀가해서 줄곧 정은이에 대한 생각만 했구... 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맞춰볼래?"
"... 어디?"
"정은이네 집 근처... 실은 나... 정은일 봐야 잠을 이룰 수 있을거 같아서. 정말이지 늦은 시간인 줄 알지만... 나도 내 이런 행동을 도저히, 아니 어떻게도 설명할 순 없지만... 나... 바보같지..."
"......"
"지금 11시 45분이야. 그래... 너무 늦었어..."
"어쩔려구 서울서 여기까지 왔어요? 갈땐 어떻게 갈려구...전철도 끊길 텐데..."
"음. 걱정하지마. 실은 아버지 차 갖고 왔어. 이래뵈도 면허 따놓은 지 1년이 넘었다구... 하하.."
"... 기다려요. 거기 어디에요?"
" 24시앞"
찰칵.
앞으로 안 우석과 어쩔려고 이러는 걸까? 분명 차도 가지고 왔다니 돌아가도록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 밤중에 그를 만나러 나간다니...
아무래도 무언가에 홀렸나 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