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닷없이 고무줄 끊고 달아나는 머슴애 뒤쫓아가며 바락바락 달겨들던 가시내 눈흘김조차 예쁘던 얼굴에 악으로 안될 때 흘리던 눈물콧물자국 다 지우듯이 쌀을 힘주어 씻어 대는 내 손목을 뉘 손목인지 홀려서 보다가 손목보다 더 하앟게 흘러 넘치는 쌀뜨물을 보다가 쌀뜨물보다 더 하얀 창고안의 어항처럼 바랜 마음 한 조각을 살그머니 건져 들다가 옳거니, 정말 맛있고 향그러운 씹으면 씹을 수록 단맛나는 오색의 밥이라도 한 번 지으리라, 제일 큰콩은 좀 더 뜨거운 불에 푹푹 삶으리라 팥은 그보다 더 약한 불에서도 부그르르 끓어대면 될테고 더운 물에 불려만 되는 율무 퉁퉁 불리고 제일 작은 알갱이들 무심히 쌀위에 즈르르르 부어 한 두어번 헹구기만 하면 될 순간에 지금까지 노란좁쌀인 줄 믿었던 것이 바로 참깨였음을 알았다. 아이고 어머니, 참깨를 참깨라고 미리 말씀해주시지 정월대보름 오곡밥마련을 위한 붉은 보자기에 비밀스레 숨겨두다니요. 무참히 엎드려서 쌀위에서 숨죽이는 참깨들을 한숨 한 번 쉬며 한 주먹 맨 우에 얹힌 녀석들을 깨워서 다른 곳에 피난 시키고 나서야 다시 물을 부어 둥둥 뜨는 놈들을 빈 조리로 건져내며 쌀만 원래대로 무사히 남긴 기쁨에 참깨여 그대 가벼워서 좋으니라, 그대, 나의 일상보다 무거워서 건져 내지 못할 절망이 아니라 가벼워서 분리가능한, 놀라긴 하였으되 갑자기 끼어든 침입자이긴 하되 가벼워서 둥둥,가벼워서 후르르, 빈하늘 향해 혼잣말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기도의 단어들을 명료하게 몰라서 어머니의 손바닥에서 훌훌 떠나가던 소짓장 멍하니 바라보던 그 때,음색만 따라하며 주문처럼 중얼거리기를 그래, 어디에 엎드려 살더라도 명을 이어 살아 있으면 다행이니라, 어디에 뒤섞여 쏟아져도 괜찮은, 작은 자존심조차 빳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제대로 제자리에 건져만 지면 되니라.순도높은 고소함을 품은 채 왜소한 몸을 뜨겁게 굴리는 오래전 고무줄 끊고 달아나던 머슴아같은 박박머리 시방도 꿈에 가끔 나타나 놀라게 하는 너털웃음,너 참깨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