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캐비닛 속에 감춰진 진실
"이게 뭐야, 18"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설 때부터 계속해서 내 입 속을 맴돌았던 말이다.
이런 갈등과 대립 구조, 야만적이고 비민주적인 일련의 사실들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친숙해져 버린 일이다. 하지만 다시금 새로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다.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실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들만 받아들이거나 조금 더 생각해서 추측해 보는 정도에 그쳐 있었다.
용기 있는 누군가의 증언이나 기록이 없다면 권력자에 의해 사장되거나 영원히 의문의 꼬리를 달고 철제 캐비닛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이 바로 진실이다.
'연좌제',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색깔인가를 조정래의 「한강」에서 읽었었다. 그 옛날 계백 장군이 출전 당시 처자식의 목을 베어 결의를 다진 것에 대해 인권유린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는 시기에서 상반된 상태의 가족들이 처해진 또 다른 시대상황을 보았다.
처자식을 버릴만한 사상이 비정한 것이라면 가족까지 한 물감통 속에 집어넣는 체제는 인도주의적인 것인가? 도대체 '국가'란 존재는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던가? 살인범, 또는 빨갱이의 자식일지라도 엄연한 인격이 있고 한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앞을 보아도 죽음이고 뒤를 보아도 죽음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동지가 있었다. 사회에서 추방당하고 삶에서도 버려진 그들에게 던져진 '희망'이라는 살코기 한 점은 그것이 독이 발라진 것이라 해도 덥석 물어야할 먹이였다. 국가의 맹견으로 사육된 그들은 결국 사냥감이 사라진 산에서 쓸모 없는 짐이 될 뿐이었고, 사냥감을 향하던 총부리가 어느새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음을 알고 동물적 본능으로 먼저 주인을 물어뜯으려 했을 뿐이다. 죽음은 친숙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택하고 싶었던 그들이었다.
조 중사와 박 하사,
극한 상황에서의 이들의 변신이 의아했다. 인간미 넘치던 박 하사는 죽음 앞에서 개인적 삶에 급급한 상대적 비정함을 보였고, 목표의식에 냉정하고 모질기만 했던 조 중사는 인도주의적 대안을 모색했다.
3년여를 '실미도' 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함께 했던 기간병과 훈련병들은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 결국 처절한 대결 구도를 보여 준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결국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에 나타난 분단 국가의 야수성과(6.25전쟁)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서로를 향해 최루탄과 몽둥이를 휘두르던 아픈 모습을(80년대 전경과 대학생) 겹쳐 보이게 한다. 그 공존의 모습은 너무나 처절했다.
몇 십 년이 지나서야 입을 연 기간병들의 증언을 통해 구성된 영화는 완벽한 연출보다는 진실의 전달에 역점을 둔 듯하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 부름을 받았던 사회적 소외 대상들이 얼마나 철저히 이용되고 버림받았는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감독 : 강우석
주연 : 설경구, 안성기, 정재영, 허준호, 임원희 등
제작 : 한맥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