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이었던 지난 일요일에 어머님 묘소에 다녀왔다. 복잡한 한식날을 피할겸 해서 미리 다녀온 성묘였다. 또 유난스럽게 더디오는 봄을 남도의 들녘을 따라가며 만나고자 했던 봄여행이기도 했다. 남도의 들녘을 특징짓는 것은 유난히 붉은 황토흙이다.
어찌보면 남도의 봄은 짙은 황토흙이 키워내고 있는 푸른보리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칙칙한 회색빛 도심을 빠져나와 벌건 황토밭에 자라고 있는 보리밭의 초록빛을 발견하는 순간의 그 감흥은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어떤 근원적인 그리움을 불러 오는 느낌이다.
어머님의 묘소 옆에도 특유의 벌건 황토밭이 키우고 있는 넓다란 보리밭이 있었다. 보리밭은 굳이 조심스럽게 가장자리를 따라 보리를 피해가지 않아도 된다. 농작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밭가를 걷는 아이들에게 보리밭을 마음껏 밟아도 좋다고 일렀더니 오히려 의아해 하며 엄마를 쳐다 보았다. '보리는 말이야, 밟아 주어야 더욱 잘 자란단다. 그러니 걱정 말고 꼭꼭 밟아주어라'..
그제서야 아이들은 이게 어인 행운 인가, 하고 망설임없이 보리밭속으로 뛰어들었다. 눈에 보이기엔 여리디 여린듯한 보리싹이 그래도 안되어 보였나 보다. '엄마, 정말 이렇게 밟아도 보리 안죽는 거야?' 재차 확인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귀엽다. '그러~엄, 맘껏 밟아라, 잘 밟아야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거든'.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아예 보리밭에서 뜀박질을 한다. 야트막한 산등성이 그 아래를 가득 보리밭이 펼쳐져 끝간데가 없어 보였다.
그날따라 유난히 푸르른 봄하늘과 보리밭이 만들어낸 푸른선이 지평선이 되어주던곳, 바로 그곁에 어머님의 산소가 있었다. 인사를 올리기 전에 먼저 오는길에 수목원에서 사온 철쭉나무 묘목부터 심었다. 지난가을에 심은 국화꽃 옆으로 줄을 맞추어 철쭉묘목을 심었다.
국화꽃은 지난가을 꽃을 잘 피웠는지 지난해 꽃피운 꽃대가 시들고 새로운 가지가 나고 잎이 돋고 있는 중이었다. 심고 있는 철쭉묘목도 꽃망울이 달린걸 보니 따뜻한 햇볕이 드는 어느 봄날에 붉은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았다. 생전에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님이 참 좋아하실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아이들과 나란히 어머님께 인사를 올렸다. 동안에도 잘 계셨는지, 이젠 정말 평안하시고 행복하신지 여쭈었다.
어머님 산소주변과 보리밭가에 햇살이 따사롭게 비춰들면서 봄풀들이 하나둘 올라오는것이 보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선 이제 갓 올라오기 시작한 쑥이 그곳에선 제법 자라 있었다.냉이도 캐고 아무런 도구없이 손으로 쑥을 뜯었다. 집에서 가서 쑥차나 한잔 끓여 마실 정도만 캐리라 생각하고 뜯은 쑥이 곧 한웅큼이 되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엄마 곁에 쭈그리고 앉아 쑥뜯는걸 도와주어서 어머니 산소옆 보리밭가에 앉아 한참을 그렇게 쑥을 뜯었다. 이번엔 쑥차랑 쑥밥도 해먹자며 .....향기로운 쑥냄새가 손끝에서 풍기고 쑥을 품었던 내 옷에서도 풍기고 쑥 뜯는 엄마를 따라 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에도 묻어났다. 햇살이 고루 비추자 보리밭이 빛이 났다. 어디선가 불쑥 종다리가 우짖을 것 같은 남도의 푸른봄빛...
아이들과 내가 따사로운 햇살속에서 쑥을 뜯는 동안 남편은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아이들이 뛰놀던 보리밭, 철쭉을 심은 어머님 산소, 보리밭가에 파랗게 올라온 봄풀들....아, 남도의 봄은 벌써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여름에 다시 올거라고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뒤돌아 오는길은 이번에도 아쉽기 마찬가지다. 그래, 있을때 잘해드릴것을 이렇게 가시고 나니 안타까운 마음만 한량 없는걸...
그렇게 가져온 쑥을 다듬었다. 결코 코를 찌를듯한 강한 향이 아닌 은근하게 오래 가는 쑥향기에 취하면서. 잘 다듬은 쑥을 밥할때 적당양을 넣고 새송이 버섯을 알맞은 크기로 잘라 밥을 했다. 밥이 다 되고 뜸을 들일때 부터 은은한 쑥향기가 부엌으로 부터 전해져 와 입맛을 다시게 한다. 본래 쑥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해본 쑥영양밥은 갖은양념에 참기름을 넉넉히 부은 소스에 비벼만 먹어도 맛도 영양도 최고인 봄철의 별미밥이다.
갓 올라온 새싹이라 연하고 고소한데 쑥의 은은한 향기도 여전히 살아있어 입맛을 돋군다. 영양과 향기를 먹는 특별한 느낌, 그것은 봄을 먹는 기분이었다. 밥을 하고 남겨두었던 쑥은 차로 끓여 마셨다. 이틀정도 베란다 햇볕에 말려 두어 꼬들꼬들한 상태였던 쑥을 끓인 물에 넣어보면 자연스럽게 풀어지면서 처음 캤던 원래의 쑥으로 돌아간다. 뜨거운 물속에서 파랗게 다시 피어나는 쑥이 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쑥이 다시 살아나네?'였다.
쑥영양밥 보다는 쑥차가 향기면에서 한수 위인것 같다. 쑥차는 말그대로 향기를 마시는 일이다. 온몸으로 쑥 향기가 번지는 느낌의 쑥차를 마신다. 쑥과 한 며칠동안 집안에 배인듯한 쑥 향기가 봄느낌을 확실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다듬고 난 쑥을 망에 넣어 따뜻한 물에 우려냈다. 욕탕에 우려낸 쑥물을 풀어놓으니 쑥탕이 따로 없다. 집 안 가득 향긋한 쑥 향기가 넘쳐난다. 쑥 향기 따라 봄이 우리집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