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여자'라니, 영화제목 치고는 그 강도가 다소 약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는 여자'앞에 오직 한 남자만.. 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는여자라니... 그래도 이나영이 나왔다면 한번 쯤 봐줘도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은근히 이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괜찮은 연기자다. 지금까지 우연찮게 그녀의 연기를 눈여겨 보았는데 보고난 느낌이 좋은 연기를 하는 몇안되는 여배우 라는 생각이 든다.
잠깐 감독이름을 들여다 본다. 장진.. 개그맨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그의 명성(?)을 다소 무그러 뜨리는 측면이 있는 이 남자가 그나저나 참 영화작업을 오래 하는구나 싶었다. 우리 영화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개그맨 출신 감독의 영화라는 점은 영화가 좋은 내게 이렇다할 매력을 주지 못해서 인지 한번도 그의 영화를 본적이 없었다.... 이번엔 평단의 호평이 있었으니 한번 보고 싶구나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런 미인 이나영과, 개그맨 출신 감독의 결합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깡패' 역활을 도맡아 오다 시피한 배우 정재영 까지 합세했으니 은근슬쩍 이 영화가 더욱 궁금해 졌다.
서둘러 갔는데 앞부분 10분이 지나가 버렸다. 남자 주인공 동치성이 어떻게 해서 '암선고'를 받는지 모르는채. 무려 10년간을 짝사랑 해온 그 남자를 무슨 일이 있어 단순히 아는 여자 라는 이유로 술에 취한 치성을 여관으로 데려 갔는지 알수 없게 되어 버렸다.
보다 보면 앞뒤 이야기가 맞춰 지겠지, 화면을 따라 간다. 옅은 화장의 이나영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처녀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무려 16년 동안이나 주변을 맴돌며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키웠는데 어쩌면 그렇게 무디게도 치성은 전혀 알아 차리질 못한다.
치성은 야구선수다. 별 볼일 없는 외야수. 그는 최고의 투수를 오랫동안 꿈꿔 왔지만 그에게 외야수 자리야 말로 가장 적당한 자리다. 그건 본인 말고는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런데 이 만년 외야수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사랑이 뭔가'이란다. 사랑이 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 야구선수라니... 대단히 낭만적이다. 그 설정 부터가 재밌다.
연출 방법이 매우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시라, 10년 동안 이나 짝사랑 하는 남자를 못 잊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하는 여자와 사랑이 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투수가 꿈인 야구선수가 주인공인 영화를...
영화는 그렇게 로맨틱 코미디의 룰을 따라 가다 문득 감동과 해학을 한번씩 떨궈 준다. 한이연, 그는 여고때 딱 한번 야구복 입은 동치성을 만나고 사랑에 빠져 버린다. 단번에 가슴에 들어온 동치성 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며 한발 한발 그의 발끝을 따라 간다. 치성은 69번째 걸음을 걷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연의 집으로 부터 69걸음 그곳에 사는 치성은 같은 동네에 살아가는 남자인 것이다. 그렇게 69걸음 부터 시작해서 39걸음으로 짧아진 어른이 되기까지 10년 동안이나 이연은 치성을 향한 사랑을 마음속으로만 키운 것이다.
그런 치성이 암선고를 받던날, 이연이 일하는 카페에서 술을 진창 마시고 쓰러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치성을 여관에 옮기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한 남자를 세세하게 들여다 본다. 그리고 그 얘길 라디오에 사연을 띄우는데 우연히 그걸 듣게된 치성은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느끼게 된다. 이건 뭔가,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치성에게 이 새로운 방식의 사랑은 도대체가 의심스럽다. 이것도 사랑인가, 싶어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본다. '사랑이 뭐죠?"
쫒기던 도둑을 감화시키고 돌아서는데 도둑이 그랬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은 그냥 사랑하는 것이라고' 어느날 야구장에서 9회말 급박한 상황에서 공을 던지다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을 만나게 된날 코치는 그렇게 말한다. '사랑하면 이름과 나이와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 보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
치성에게 사랑이 절박한 이유는 그가 살아갈 날이 두달 밖에 남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고민도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일도 무의미 할것 같은 두달, 치성은 그냥 죽어 버릴까 싶어 가장 잘 죽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한다. 마라톤을 하다 죽으면 얼마나 근사할까, 싶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그만 등수에 들어 죽는 대신 김치냉장고를 부상으로 받는다.
영화는 그런 식이다. 진지한가 싶으면 불쑥 웃음이 나오는 식이다. 시종 깔깔대며 영화를 보았다. 어눌하기로 작정한 정재영과 이나영의 대사들이 은근슬쩍 웃겨서 나는 영화 보는 내내 박장대소를 해서 옆 사람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치성의 두달이라는 남은 생애 동안 이루어야 할것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곁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의심쩍어 눈을 다른데로 향하는데 우연히 도둑이 이연과 치성을 한군데 묶어 주는 역활을 한다. 도둑과 장물애비 관계로 의심을 받아 경찰이 치성의 집을 접수하고 '아는여자'인 이연의 집에서 동거 아닌 동거에 들어간 것이다.
이연은 이 황당한 동거에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한다. 그래, 10년을 기다렸다. 드디어 나는 오직 한남자만 아는 여자, 오직 한사람을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가는구나...이연은 치성과 태연하게 데이트를 즐긴다. 죽을날이 멀지 않은 치성이 시종 우울 모드를 연기하는 가운데 혼자 들뜬 이나영은 순진한 미소로 치성에게 열과 성을 다한다.
그를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식탁을 차려 몇시에 들어올 것인지 묻는다. 함께 식사를 하고 과일을 깍아 거실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젼을 함께 보기도 한다. 이연은 행복에 겨워 어쩔줄 몰라 하지만 치성의 마음은 한없이 복잡하다. 야구인생도 끝날것이고 경찰이 접수한 집은 들어갈 수도 없고, 시간 아까운데 경찰에 왔다갔다 하는 일도 싫다.
그렇게 영화는 죽음을 향해 치닫는 치성과 사랑의 느낌으로 충만한 이연을 대비시키고 끝내는 치성의 죽음이 있겠구나 싶은 싯점에서 반전이 시작된다. 해학적인 상황반전이 또한 우습다. 치성의 암선고가 의사의 오류였음이 판명된 것이다.
치성은 이 갑작스런 암선고 번복에 대해 단순에 기뻐하지 않는다. 죽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집이 날라가고 죽을 텐데 뭐하러 열심히 할건가 싶어 야구도 끝낼 생각이었는데 말 그대로 집도 없고 직장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사실이 살아났구나 싶은 기쁨을 상쇄시켰다고 생각한 것이다. 못마시는 술을 진탕 마시고 거리를 배회하다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무미건조하게 이 엄청난 사건을 담아내는 감독의 시선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는데 치성은 그녀에게 사랑에 대해 묻는다. 죽어가는 여자는 치성에게 다가오는 사랑을 붙잡으라 일러주고 하늘나라로 간다.이 난데없는 상황 이후로, 영화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영화에서 처럼, 치성이 길거리의 전봇대에 손을 갖대 댄다. 이 마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거라... 그러자 정말로 영화에서 처럼. 치성의 뜀박질에 맞춰 이전봇대에서 저 전봇대까지. 이전선에서 저 전선까지 불꽃이 튀어 이연에게 쏜쌀같이 흘러간다. 이 장면이 참 근사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흐르는 전선이라...
이연 앞에선 치성, 날 사랑하느냐 소리쳐 묻는 바보같은 질문에 이연은 치성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사랑해요'라고..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다시 살아난 치성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부터 시작하고 싶다.. 비로소 여자의 이름과 취미와 나이와 좋아하는 음식이 궁금해 진다. 하나 하나 대답하며 걷는 두사람을 전봇대가 내려다 보고 있다.
이 엉뚱한 영화가 재미와 감동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사랑의 정의'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낭만적인 야구선수와 한사람 만을 오직 아는 여자의 사랑이 기묘한 아름다움과 잔잔한 여운을 던져주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니 나도 문득 궁금해 진다. '그런데 사랑이 도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