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이란말이 참 좋다.
'산책'이란 말에서 유월의 숲과 같은 싱그러움이 한껏 묻어난다.
유월은 산책하기 좋은달... 그것도 조금 늦은 저녁의 산책이라면 더욱 좋겠다.
하루 하루의 삶이 지난하다고, 잠깐 주저 앉아 있었다.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와 잔뜩 찌뿌리고 있었는데 참 오랫만에 남편이
산책을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얼마만인가, 벌써 십여년 전일이 되어 버렸다. 그때,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때,
퇴근해온 남편은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위해 저녁 산책을 제안했었다.
배불뚝이 아내와 손을 잡고 동네를 한바퀴 돌던 남편의 얼굴은 참 편안했었다.
소소한 일상의 여유속에 행복을 심을줄 아는 이가 가지는 편안함이
남편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그 시간이 나도 참 좋았다.
저녁을 준비하면서도 산책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들뜨곤 했으니까..
내가 아이를 낳기 몇일전까지 얼마동안의 저녁 산책이 계속되었다.
달이 뜬 밤이나 별빛이 내리는 밤, 그도 아니면 가로등 불빛아래서
성당벤치에 앉아 저녁바람을 맞으며 도란도란 얘길 나누던 일들이 꿈결처럼 아련하다.
그렇게 십년의 세월이 흐른 동안 나는 항상 십여년 전의 저녁산책에 대한
흐릿한 잔상만으로도 행복한 상상에 빠져 들수가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제안을 했었다. 그때처럼, 둘이 손잡고 저녁에 산책하자고..
시간은 왜 그리도 빽빽하던지, 남편과 나는 좀체 산책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문득, 어제 산책하자고 내민 남편의 손을 보며 그때 그생각이 떠올랐다.
유월의 저녁바람이 소슬했다. 짙어가는 녹음이 비릿한 향기를 소슬바람에 실어
살랑이듯 나뭇가지를 흔드는 밤이었다. 집앞 전나무가로수에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가지마다 빽빽히 잎새를 틔운 전나무 사이사이로 가로등이 비춰들어
내가 즐겨 걷던 그길이 신비롭게 보였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전나무 잎새 사이로 개구리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 앞에 서라며 사진기를 꺼내는 남편은 디카로 야간촬영을 시도해 보겠단다.
오늘 오붓한 데이트는 글렀구나.. 오랫만에 카메라 앞에 서니 도대체 어색하기만
한데 남편은 자꾸 여기 서보라 저기 서보라며 주문도 많다.
디카가 온날부터 남편의 소일 거리가 하나 추가되었다.
이 새로운 디지털 방식의 카메라가 재밌는지 여러가지 다양한 기능들을
익히고 써먹느라 바쁜 남편이 신기할 정도다.
나는 어쩔수 없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라는 핑계를 대고 복잡한 디카의
기능 따위엔 하등의 관심조차도 주려 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 보면
디카에 푹 빠진 남편이 신기하게 보이기 까지 한다.
어쨌든 오랫만에 찍는 사진이 어색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얼굴에서 나이를
실감하게 된 후로 나는 사진 찍는게 그렇게 달갑지가 않다.
오랫만의 데이트를 사진기가 방해 하는구나 싶어 나는 내심 언짢은데
남편은 오히려 신이 난 표정이다.
야간촬영 이란게 쉬운거 아니라며 짐짓 어줍잖은 사진작가
흉내를 내는 남편. 그렇게 좋다는데 내가 좀 협조를 해주어야지 싶어
구석구석 산책길을 앞장서 안내하기로 했다.
여긴 전나무숲길... 비디오 빌리러 가거나 혹은 수퍼가기 위해 내가 자주 걷는길.
이길 걷고 있으면 전나무가 품어내는 향내가 은은하게 나는것 같아 좋아.
요즈음엔 개구리 울음소리가 얼마나 싱싱한지 말이야, 전나무 푸른잎과
누가 더 싱그러운지 내기를 하는것 같단 말야...
지난 겨울동안 이 길에 들어서면 달빛이 한가득 쏟아지곤 했어.
지금 잎이 무성하니 달빛도 끼어들 틈이 없는 거 봐..
여긴 라일락이 피어 향기로 말을 거는 곳이야. 이렇게 철계단을 내려 막 눈을
들어 보니 거기 보라색 라일락 꽃이 피어있었는데 처음 꽃을 본날 얼마나 반갑던지
한동안 여기 철계단에 이렇게 서 있었지 뭐야.
그리고 계단을 내려 가면 할아버지들이 게이트볼 치는 곳이 있어.
날마다 열심히 와서 운동들 하시는데 참 보기좋았어.
여기 용설란 닮은 선인장이 건강해 보이지? 이 길따라 내가 처음
자전거 연습을 했거든. 저앞 경비실에 아저씨가 보다 못해 손수 시범을
보이며 설명을 해주셨지. 조금 경사가 진 이길을 지날때마다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
그대로 아래로 굴러갈것 같아 브레이크 잡는 손에 어찌나 힘을 줬던지
나중에 어깨가 다 뻐근할 정도였다니까..
잠깐 여기 앉아봐. 둥그런 벤치에 사람들이 자주 앉았다 가곤 하는데
여기 앉아 있으면 정말 시원해. 안쪽에 있는 나무는 단풍나무고 벤치 가운데
우람한 저 나무는 느티나무야. 저 느티나무가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 들이지. 지난 대보름날엔 아이들하고 달맞이를 했던 곳이기도 해.
어때. 개구리 울음소리도 제일 가깝게 들리고 이곳 좋지 않아?
엊그제 달빛이 참 좋았는데 오늘은 대신 별빛이 곱다.
별빛을 받고 더욱 진한 향기를 내품는 장미가 핀 담장길을 돌았다.
내리는 별빛에 흰장미는 더욱 고고하고 빨간장미 향기는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흰장미꽃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별빛을 보고 있노라니 별빛이 흐르는 소리를
녹음하던 영화얘기가 생각났다.
그땐 그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별빛흐르는 소리를 어쩌면 들을수 있을것
같은 밤.
장미향기와 함께 별빛아래를 걷던 저녁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싱싱하게 전달하던 저녁바람이 한동안
마음한켠에 남아 비루한 내 일상을 향기롭게 가꾸어 줄것같은 그런 밤이었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 대추나무가 서있고, 목련이 서있는 입구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산책이 다 끝나니 이제야 사진기를 접고 남편이 손을 잡는다. 차거워진 내 팔을 감싸안은
남편의 손길이 따스하다. 유월의 밤은 산책하기에 참 좋았다.
산책에서 돌아온 남편은 '산책중'이란 파일을 만들어 메일로 전송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