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으로 주말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삼척이나 동해 쪽으로 가야지
했던걸, 울진으로 여정이 잡혔다. 토요일 늦게 출발을 해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삼척항 쯤에 도착해 보니 어느덧 밤 11시.. 그대로 울진까지 갈수 있을까
싶어 고민을 하는데 '맹방해수욕장'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였다.
우리 여기서 머물자.. 나의 급작스런 계획수정에 남편은 흔쾌이 동조를
해주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그때부터 여유있게 저녁부터 먹자며 그곳에서 가까운
대진항을 찾아 길을 달리는데... 거리가 너무 깜깜했다.
가로등도 깜빡 졸고 있는 해수욕장 근처 해변마을은 너무나 고요했다.
하긴, 여름도 아닌 오월에 바다를 보러 올 사람 몇이나 있을까?
대진항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따라 가다 길을
잘못들어 같은 방향을 두어번 돌았다.
안되겠다 싶어 맹방해수욕장 근처로 다시 돌아와 보니 거리도 집들도
모두 불이 꺼졌다. 저녁을 굶는것 까진 좋았는데 어디서 잠을 잔다지?
숙박을 할 만한 곳을 물색하다 우연히 '민박마을'을 발견했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는데... 민박마을을 발견하고 비로소 안심이 되었던 것과 동시에
동네에 들어서니 이 동네도 모두 불이 꺼져 있는 것이다.
초행길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안되는 데다가,
그대로 나가면 꼭 동해바다로 퐁당, 빠질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차를 몰아 오면서 보니 양쪽에 바다도 아닌것이 잔잔하게
펼쳐진 곳들이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물이 찰랑찰랑한 모내기를 끝낸
논이었지만...
어쨌든, 동네로 들어서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작은 마을이었고,
어촌과 농촌이 복합된 동네분들은 고단한 하루를 일찍 마감하고 잠이 든
시각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으로 넘어가고, 이젠 그 길로
다른곳으로 나가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한집에서 불빛이 흘러나온다.
염치불구하고 문을 두드렸다. 풍채도 넉넉하고 말씨가 구수한 주인아주머니가
따라나와 이동네에 괜찮은 펜션이라며 안내를 해주시겠다고 차에 오르셨다.
골목을 두어곳 지나쳐 감자밭이 집앞에 펼쳐진 펜션에 도착했다.
그집도 이미 불이 꺼져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해 주시던 아주머니께서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가며 주인을 기어코 나오게 하셨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비수기에 원 만땅??
다름이 아니라 지난해 태풍피해를 많이 입은 곳인데 지금 한창 복구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공사인부들이 방을 다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이 동네에선 도리가 없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데
'누추하지만 우리집으로 가요'하시는 아주머니. 삼척, 근덕면 하맹방의 김경희아주머니가
낯선 여행객을 데리고 집으로 데려가 주셨다.
대개는 펜션을 이용하거나 가고자 하는 장소와 가까운 민박집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는 편인 우리가족은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가정민박(?)을 하게된
행운을 누린 것이다.
편안하게 생각하라며 장성한 세딸을 한방에 밀어 넣고는 우리를 위해
큰방을 내어 주셨다. 미안한 맘, 고마운 맘으로 인사를 드리고 편안하게 잠을
잘잤다. 별빛이 밤새 집마당으로 쏟아졌다.
동해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었고, 이제막 6시가 되었는데 벌써 동쪽 하늘이 발갛게
밝아 있었다. 잘자고 기분좋게 일어난 아침, 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씻고
짐을 챙겼다. 일찍 나서야 오늘 일정을 소화할 것이었다.
주인한테 인사를 드려야지 싶었는데 너무 일찍이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일어나 계셨다.
그집 중학생에게 내 노란색 여름잠바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라도 고마움을 표시
하고 싶었다. 그리고 잠바주머니에 민박집 정도의 숙박료를 꽂아서 아주머니께
주고자 했는데 글쎄 중학생 따님이 170이 넘는 키에 운동선수 뺨치는 허우대를
자랑한다며 내잠바를 다시 돌려 주신다. 내 작은 노란잠바가 쑥쓰러웠다.
그래서 숙박비를 대신한 얼마되지 않은 돈을 아주머니 손에
쥐어 주고 새벽길을 나섰다. 우리가 가는데 까지 따라나와 염려해 주시던
고마운 아주머니께 깊은정을 느꼈다.
아침에 보니 동네가 참 아담하고 예쁘다. 감자꽃이 핀 밭도 정겹고 마을 길마다
조성해 놓은 해당화가 막 피어나는 모습도 예뻤다. 아주머니 말씀에 의하면
이 동네가 해당화로 유명한 곳이었다지? 해당화가 가득핀 동네, 그 사이로
홍송이 멋드러지게 자리한 맹방해수욕장마을...
지금은 당뇨병에 좋다는 소문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해당화를 다시
심는 동네사람들의 노고가 계속된다니 먼훗날은 해당화 가득핀 아름다운 고장을
다시 볼수 있으리라...
고요한 아침바다. 명사십리 고운 모래밭... 해가 붉게 솟아오른 수평선... 아득히 먼 바다!!
동해바다의 이미지 속으로 한발 한발 들여놓은 일이 행복했다. 우리가족 말고
아무도 없는 아침의 동해바다는 온통 우리만의 바다..
멀리 두개의 점이 가까워 왔다. 그바다에 이른 데이트를 즐기는
멋진 젊은이가 누군가 궁금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노부부다. 참 아름다운 사람들.
정답다. 바다도 노부부도. 아이들은 집채만한 파도가 세차게 부서져 하얀포말을
만들며 발끝을 희롱하는 바다를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맹방해수욕장은 영화 '봄날은 간다'를 촬영했던 장소다.
유지태가 파도소리를 녹음하던곳, 소리를 녹음하다
무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영애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던 바로 그 장소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노래를 어색하게 부르던 상우역의
유지태가 불쑥, 튀어 나올것 같았던... 희미한 미소로 상우를 바라보던
은수역의 이영애가 명사십리 모래밭 어디쯤에 앉아 있을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던
곳이었다.
나는 줄곧 누군가가 생각났다. 우리의 동해바다님!!
이럴줄 알았으면 전화번호라도 주고받을 것을.... 혹시 조금 있다
죽서루에 들르면 그곳에서 우연처럼 만날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보며
맹방해수욕장과 이별했다. 해수욕장 입구쪽에 핀 해당화가 아침기운에 신선하게
피어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삼척항정라진에 도착했다. 바다냄새가 진하게
몰려왔다. 그곳은 항구. 지금은 어디나 그렇지만 이곳의 항구도 예전의
용도로 부터 많이 멀어져 그저 한산한 작은포구 역활만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잔잔한 물결위에 정박해 있는 어구를 갖춘 배들도,
바다를 인접해 나란한 '바다'라는 이름을 단 상가들이 정겨워 어쩐지 고향에
온 것처럼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항구가 가장 잘 보이는 '동아식당'에 들어
아침을 청했다. 손님보다 식당식구가 많았던 집, 그식당가족도 모두 참 친절했다.
묻는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주고 아이들을 위해 반찬이며 그릇까지 배려해 주시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바다를 보며 아침 식사를 하는 기분은 아주 특별했다.
제법 따가운 햇살이 항구의 물빛을 비추고 동네를 밝게 만들어 주었다.
이젠 죽서루 가는길... 일요일이라 동네도 한적하고 죽서루에도 우리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이곳에 가면 동해바다님을 만날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그곳... 검은색 대나무를 보다가, 350년이나 되었다는 회회나무 잎을 쳐다보다가
그리고 화장실앞에 화려하게 만개한 작약꽃을 보다가 동해바다님을 생각했다.
사물과 사람이 하나로 묶어지면 그리움이 되는 법인가..
아마도 동해바다님도 대나무 사이를 지나 송강정철가시비도 보고 느티나무에
핀 벌레같은 꽃봉오리도 보고 그랬을 것이다. 사방이 트인 죽서루에 올라
오십천변에 날아든 하얀새도 감상하고 그랬을 것이다.
죽서루 누대에 걸린 현판들을 보며 옛 사람인 그들이 시인묵객이 되어
남긴 글귀를 들여다 보며 상념에도 젖었을 것이다.
용문바위를 지나 용혈자국을 찾으려 나처럼 그리 오래 바위를 들여다 봤을지도...
나무들이 참 좋았다. 아찔한 암벽같은 용문바위를 올라 오십천변을 바라다
보는 일이 참 좋았다.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오던 죽서루에 올라 으슬으슬 추워질까지
현판을 바라보다 내려와 죽서교를 건넜다. 죽서교는
지금 한창 공사중... 오십천 맑은 물에 포크레인 굉음만 들려왔다.
공사장을 비켜 흐르는 오십천에 은빛 은어가 뛰어노는 풍경이 마음을 환하게 하고...
깍아지른듯한 벼랑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죽서루는 가장 오래된 누정이라고
하니 새삼스레 그 시절 저 누정을 설계했던 선비의 마음이 부러워 진다.
맹방해수욕장에서, 정라항 동아식당에서, 식당에서 소개시켜준 자연건어물 상회에서
그리고 심지어 죽서교앞 수퍼에서 바다처럼 넓은 인심을 만나고 왔던 행복한 여정.
자연은 결코 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알겠다.
그속에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아름다운 풍경이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사실을 알것 같다.
가는봄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