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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에 서다.


BY 빨강머리앤 2003-11-16

'여행'이랄것도 없는 '길떠남'을 자주 갖고저 노력을 한다.바쁘게 흘러간 일주일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일요일 하루는 여유와 느긋함으로 보내고자 하지만 그것도 쉽잖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 여유와 느긋함은 오히려 작은 길떠남을 함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 같아.., 일주일 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늦잠을 자기 일쑤고, 어디 나서는게 아침에 안떠지는 눈꺼풀 만큼이나 무겁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 게으름을 털고 길을 나서면 우선은 상쾌한 바람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해오곤 한다.

그 느낌, 일하러 가는게 아니라 오로지 바람과 맞서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길떠나는 그 첫느낌이 참 좋다. 여행이란게 별게 있나, 내집 주위를 돌아도 천천히 여유롭게 한갓진 길에 피어난 작은꽃, 여린풀잎을 감상하는 일도 넓게 보면 여행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으리라. 일찍 나섰으면 조금 멀리 가보련만, 오늘또 게으름을 한껏 피우다 점심때가 가까워 오니 아쉬운대로 가까운데로 여정을 잡는다. 놓고 가자는데 오늘은 '자건거 여행'을 하자며 아이둘은 벌써 자전거 안장위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

바람이 거세구나. 몹씨 찬바람이 부는 걸 보니 대관령에 내린 첫눈 소식이 여기도 곧 날아올것만 같은데... 각자 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 쓰며, 장갑얘기도 나왔다. 그렇지..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린 길가의 가로수들좀봐.. 몇개 남은 잎새들 바람과 내기라도 하고 있는듯해.바람이 자꾸만 불어와 남은 몇개의 잎새 떨어뜨릴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고 나뭇잎은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것 같기도 해.

지만, 모르지 그건 어디까지나 바라보는 내 시선인지도 말이야. 나뭇잎은 지금 초연햔지도 몰라. 어쩌면 바람이 더 세게 불어서 자신을 떨어뜨려 주기를 바랄지도 모르지.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싶은 건지도. 안간힘 쓰는 대신 흙으로 회귀해서 나무뿌리에 스며들 겨울이불이 되고 싶어하는지 누가 알겠어. 더 생각할 필요없어, 그렇게 계절이 가는걸 몰랐나? 마지막 남은 몇개의 잎새를 달고 할랑거리는 노란잎을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하늘에 비춰본다. 일부러 고개를 외로 꼬고. 몇개 남은 벗나무 가지 빨간잎새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푸른하늘바다를 배경으로 올려다 본다.

아, 시리다. 그 색감 기가 막히게 예뻐. 어쩌면 파란하늘은 모든 잎새들의 배경이 되어 줄려고 저리 푸른가 보다. 이제 하늘은 더 차고 맑을 준비를 하는건지 바람을 더 많이 불러 들이고 있네. 자전거 타고 앞서가는 아이들 볼이 단풍잎 같이 빨갛구나. 산입구, 언제 저리 길게 뚫어 놨을까. 산이 뻥 뚫려 있어서 그리로 방향을 잡았다. '출입금지'란 팻말을 무시하고 길을 닦기 위해 산을 뚫고 길을 다져 포장을 하기 위한 길 앞에 선것이다. '우리 이길을 달려보자'고 앞장을 섰다.

4차선 도로, 인도까지 포함하면 6차선 도로쯤 되는 넓은 길을 아이둘과나, 셋이서만 달리는 기분 정말 뭐라 할까. 아이들 표현대로 '짱'이다. 6차선쯤 되는 잘다져놓은 비포장길에 우리만 있어서 인가, 한없이 넓어 보이는군. 모자로 귀를 막으니 아뭇소리가 안나는데 갑자기 모자를 벗고 싶었지. 그때 비로소 바람에 낙엽 쓸리는 소리 사락, 사그락 거리는데 그 소리 왜 그리도 처량한지. 그 소리는 그냥 낙엽 쓸리는 소리만이 아니었네.산이 웅웅, 우는 소리 같았어. 산을 깍아내서 이렇게나 큰 상처를 낸 사람들을 향해 처절한 울음을 우는듯해 부는 바람이 모두 심장으로 몰려 오는 느낌이 들었다. 낑낑대며 아이들 앞서가다 저만치 엄마를 기다려서 발길을 재촉하면서도 내내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도.. 자연은 한아름의 여유를 안고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그 자연이 주는 여유로움 속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순수한 동심을 회복하는가. 팔을 벌려 늦게 온 엄마를 안아주는구나. 바람속에서 발갛게 익은 볼을 하고 환하게 웃는 저 모습 얼마만인지. 이렇게 웃어주는 아이들 그 연한 살을 부비면 어릴때 엄마가 만들어 조금씩 맛보여주시던 '진달래 꽃술'맛인걸.참 달았어. 그냥 단게 아니고 맛나게 달콤한 그맛, 절대 못잊지.

오르막길을 벗어나니 평탄한 길이 이어지고 멀리'모란터널'이라 써놓은 곳에서 공사중인지 소음이 들려왔다. 저기까지만 가자, 오늘만 우리 6차선 도로 전세낸 기분 한껏 만끽하고 저기를 돌아서 오자고 반이나 갔을까, 아무도 없는줄 알았는데 자동차 한대가 우리쪽으로 오더니 '얼른 나가세요'하네. 그래, 입구쪽에 '출입금지'란 말이 있었지. 그말 무시하고 들어왔으니 나가란 소리에 아뭇소리도 못하고 돌아서 왔지만, 그래도 웃음이 났다. 아무도 없는 비포장길 오는 동안 우리만의 길이었으니, 그 기분 한껏 즐겼으니 이만하면 된거 아니냐고..

오늘은 특별한 '길떠남'을 경험했구나. 다음주에 오면 조금더 시멘트 포장길이 더 넓어져 있을 것이다. 그 흙길, 꼭꼭 다져 밟고 내려오는데 왜 그리 가슴에 짠물이 고이는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말했다. 나는 오늘 그 흙길, 오랜동안 풀들, 꽃들, 그리고 아름드리 나무들 길러냈을 그 흙길에 대고 윤동주의 시를 나즉히 읊어 주었다.

비포장길을 돌아서 나오는데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개울가에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 갈대다'하는 딸아이의 한마디가 오후로 기울어 가는 가을햇살 속으로 스며든다. 갈대가 바람이 부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하얗게 웃고 있는 길을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바람이 차고 하늘은 여전히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가을의 끝에 서본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