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깔리는 중저음의 콘트라바스...
쉰들러리스트의 테마를 들으며 나는 울었다.
인간이 인간을 유린한 역사가 너무 깊어서
인간이 인간을 미물로 전락시켜버린 결코,
아니였다고 생각하고 싶은 전쟁이 너무 잔인해서
단조롭게 울리는 콘트라바스의 음색이 상대적으로 너무나 평화로워
나는 울었다.
열두시가 가까워 오는 어느 겨울밤이었다.
늘 듣던 라디오 프로에서 잔잔하게 아름다운 일상을 풀어놓는 시간이 되었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님들이 동안거에 들어가기전 염주 손에 끼고 장삼자락 펄럭이며
강원도 월정사 입구에서 삼보일배를 시작하였다.
가끔 눈섞인 바람이 불고 스님의 회색빛 가사가 바람에 날리었지만
부처인듯 묵묵한 움직임으로 세번 걷고 한번 절하기를 계속 하시었다.
사람들이 저 만큼 서서 지켜보다가 절하는 부분에서 따라 합장을 하였더란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그길이 내처 걷는대도 쉽잖은길,
더구나 비포장 도로였다. 길은 울퉁불퉁, 모서리진 길, 흙이 둥그렇게 솟아나 있는길,
돌멩이 조차 구르는 길이었다. 찬바람이 이는데
세번걷고 한번 절하기를 처음같이 하시는 스님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났다.
전나무 숲길이 끝난 자리, 끝어질듯 이어지는 계곡물 소리는
푸릉거리며 울며 따라왔다.
드디어는 스님들 무릎께에서 피가 배어나와 회색빛 가사에 스미기 시작했다.
합장하며 따라오던 스님들의 장엄하고 묵묵한 행렬을 지켜보던
사람들중에서 간간히 한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상원사는 아직도 멀었고, 이제부터는 가파른 길을 만나야 한다.
비포장 길엔 더 많은 돌멩이 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돌멩이를
피할 생각이 없는 스님들은 걸어온 그길을 하냥 세번걷고 한번 절하기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스님 옷자락을 뚫고 피가 뚝뚝 떨어지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이야길 들으며 나는 울었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동안거가 멀지 않았다.
나의 동안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 돌아본다.
내 고뇌는 거기 어디즘에나 가 닿을거나.
충청도 공주에 가면 영평사라는 절이 있단다.
영평사는 무량수전이 오래 된것도 아니요, 절의규모가 유달리 큰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부석사처럼 의상대사가 꽂아놓은 지팡이가 피운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스님이 평생사업으로 가꾼 구절초가 3000평이라드라,, 얼마라던지,
그렇게 구절초를 가꾼 너른 '구절초밭' 이 있다지.
하얗게 구절초 핀 영평사 어디메즈음에 있을 뜨락을 상상했다.
그 앞에 내가 있고, 하얀 구절초 무리가 가을바람에 사그락 거리듯
파도처럼 흔들거렸다, 구절초 무리가 하얗게 안겨오는 풍경이 손에 잡힐듯한
그 꽃무덤 앞에 서면 나는 그만 울고 말것이다.
스님이 키운 너른 구절초 밭에서 쑥부쟁이 전설을 떠올려 본다.
옛날, 대장장이가 살았는데 그애겐 쑥을 캐다 파는 이쁜 딸이 있었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쑥을 캐러 다니는 대장장이 딸이라 하여 '쑥부쟁이'라
이름불렀단다. 어느 가을날 여느때처럼 쑥을 캐러 산으로 간 쑥부쟁이는
올가미에 갇힌 사냥꾼을 살려 주었다. 몹씨 다친 사냥꾼을 데려다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는 사이 쑥부쟁이와 사냥꾼은 사랑에 빠졌더라.
마침내 다 나은 사냥꾼이 길을 나서며 하는말, 내년 가을에 당신을 데리러
꼭 오리라 다짐하였다.
그래서 쑥부쟁이는 가을이면 바다가 멀리 보이는 산끄트머리 벼랑에 서서
님이 오시는가 하고 날마다 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고 가을이 몇번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기다리는 정든 님은 아니 오시고 가을만 왔다 가는 거였다.
시름시름 사랑병을 앓던 쑥부쟁이는 마침내 어느가을
아니오시는 님을 원망하며 기다리며 섰던 그 산끄트머리 벼랑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 다음해, 그자리에 하얗고 작은꽃이 무수히 피어났는데
그꽃은 생전 대장장이 딸의 모습하고 닮았던지라 사람들은 그꽃을
'쑥부쟁이'라 불렀다 한다.
가을꽃들이 졌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름다운 것들의 릴레이는 마지막 가을까지 눈물겨운 생명력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나니, 구절초 쑥부쟁이, 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 이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