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멈췄습니다. 한밤에 시작되었을까? 그 비가 아침까지 토독거리며 창문을
두드려 대고 있었나 봅니다. 늦잠을 자버렸네요. 비가 내리는 아침은 뽀얗게
창문을 채색했고, 햇살이 내방 창문을 노크해 주길 기다리다 그만 늦잠을 잔게지요...
밥도 못 먹고 뛰어가는 아이한테 미안해서 베란다 창문을 열어 아이가 가는
길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비가 내리는걸 그때에 알았네요. 밤새 비가 왔었고, 거리엔
비를 맞고 떨어진 갈잎들이 지천으로 뒹구는데... 아인 옷에 달린 모자를 우산대신
쓰고 달려서 학교에 갔습니다.
그 비는 가을더러 어서 떠나라고 등 떠미는 듯 했습니다. 달랑거리는 잎새 몇개 거닐고
있던 은행나무 잎새를 마저 떨어뜨리고 한창 빨갛게 타오를듯 서있던 단풍 나무 잎새도
반쯤이나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머지 않아 바람이 불어올것입니다. 겨울을 불러오는 바람.
산은 지금 가을과 겨울 그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는듯 합니다.
앞산 중턱 위에 물결처럼 단풍이 들었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습니다.
잎새를 다 떨구어낸 나목들이 지키는 빈산이 되어 겨울 준비를 마친듯 합니다만,
그아래 산아래는 아직 가을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창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으로 서 있어 애잔한 느낌마저 듭니다.
사시나무과에 속한 나무일것 같은 노란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현사시, 은사시나무. 그런 낭만적인 나무나 혹은 자작나무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건
잎새가 유난히 노랗기 때문입니다.
그 노란잎새가 도드라져 보이는 단풍사이로 잣나무 군락이 감싸인듯 안겨있습니다.
노란색과 초록색의 조화가 비오는 아침을 화려하게 채색해 줍니다.
마침내 비가 그칠 것이란듯 비구름이 산봉오리 끝에 걸려 있습니다.
하늘로 향하는 구름이 잠시 잎새를 떨구고 나목으로 서있는 산중턱의 숲을
감싸주는것 같은 풍경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강원도 산간의 겨울맞이를 본적이 있습니다.
나이든 농부들은 부지런히 밭에 심어둔 곡식들을 갈무리 했습니다.
빈대만 남은 옥수수대도 거두고, 열매를 거둔 콩대를 거두고
고추를 심어놨던 자리의 버팀대로 뽑아냈습니다. 밭작물을 키워내느라
일년동안 수고한 흙밭도 겨울동안 쉴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농부는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흙밭도 겨울잠을 잘수 있게 잠자리를 마련하는
구나 싶었습니다. 이젠 산으로 들어간 농부는 장작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지게 가득 부러진 나무가지를 주워 집으로 가져와
나무밑둥처럼 생긴 동그란 그루터기에 산에서 가져온 나무토막을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농부의 손길에 갈라지는 나뭇가지는 차곡차곡 부엌 흙담아래 쌓였습니다.
그것들은 늙은부부의 구들장을 따뜻히 덥혀줄 테지요.
산속에 있는 외딴집, 나무와 바람과 산새들만이 그 노부부의 이웃이 되어줄것 같은 그
산골의 겨울맞이를 지켜보며 마음이 싸아해 왔었습니다.
외로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농부가 장작을 패는 앞마당 한켠엔 오래된 감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감나무 가지 사이에서 산까지 한마리가 장작패는 농부의 위로하듯이
우짖고, 가지끝에 홍시몇개는 가을햇살속에서 더욱더 빨갛게 익어가고 있던
풍경... 아마도 감나무 가지 끝에 남겨진 홍시 몇개는 장작패는 농부를 위해
노래하던 산까치를 위해 남겨 놓았던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늘이
파랬습니다. 잉크를 풀어놓은것 같은 파란 하늘 잎떨군 감나무 가지사이로
자그마한 산골 농가를 비춰주던 하늘은 어찌나 파란지 화면을 바라보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맞이 하던 농부의 장작패는 소리와 함께,
빨간홍시를 몇개달고 잎새를 떨군 감나무 가지사이로 파랗던 하늘이
한폭의 수채화가 되어 내기억의 한편에 단단히 자리잡던 영상.
매년 이맘때가 되면 꺼내보게 되는 농부의 바쁜손길과 함께
아름다운 가을빛을 안고 나도 오늘은 겨울맞이를 해야 겠단 생각을 합니다.
비가 내려서 거리가 촉촉히 젖어 있습니다.
포도위에 비에 적셔진 나뭇잎들이 달라 붙어 있습니다.
나뭇잎처럼 가볍게 날리다 포도위에 달라붙는 낙엽처럼
내마음에 달라붙는 이 상념이 부디 적절한 겨울나기를 위한
그것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