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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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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자는 부부.


BY 빨강머리앤 2003-10-23

 

 

지난 겨울,눈내린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시립미술관에 다녀왔었다.

밀레의 그림들을 보러 눈길을 미끄러지며 아직도 파랗게 겨울을 나고 있는

측백나무와 잎떨군 겨울나무의 줄기를 짚푸라기 이불이 추위를 가려주고 있는

미술관앞 화단을 지나 아테네신전을 귀엽게 패러디한 듯한 미술관에 들어 섰었다.

 

밀레의 역작,'만종'과 '이삭줍기'그리고 '양떼를 모는 소녀'를 보기 위해

시간이 없다는 남편을 억지로 동행해 아이들과 나선 오랫만의 미술관 나들이 였다.

 

제1관, 제2관, 그리고 제3관을 둘러보며 고전주의에 바탕을 둔,

인상주의 화가 특유의 안개가 낀듯한

부드럽게 채색되어진 그림들을 감상하면서도 어디선가에서 불쑥, 만종이 나타나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달려온 나를 위해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 줄것만 같아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하지만, 전시관을 다 둘러 보았는데 내가 찾고자 한 밀레의 역작 중 세개의 그림이

보이질 않았다.

천천히 미술관을 돌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그림들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으니 그만 하면 되었다 싶으면서도 어딘지 모를 허탈감이

정강이께로 몰려 들어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또 몇번이나 빨리 나가자고 졸라 댔던가... 만종을 보자고 아이들에게

미리 설명을 해주었던 그 그림을 볼수 없어서 그랬던가? 아이들이 유독 그림을 감상하는

그순간의 감흥을 자주 깨곤 해서 안그래도 기분이 좋지 마는 않았는데

정작 보고 싶었던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허전함이 눈내린 미술관을 내려오면서

배신감으로 번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파리의 밀레 전용 미술관이라는  쉘부르 미술관의 사정이 있었던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억대의 보험금이 부담스러웠다든지,

아니면 밀레의 역작은 함부로 우리나라까지 올수 없었던 건지... 여러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서 밀레의 그림이 주는 잔잔한 서정까지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도 말년의 그의 그림들과 더불어 밀레를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로 까지 받들었다던

고흐의 그림이 함께 전시된 특별전시실이 있어서 그나마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밀레의 그림을 언제 처음 접했던가?

여기저기 복사본으로 나돌았던 밀레의 '만종'과 '양떼를 모는 소녀'

그리고 '이삭줍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어릴때부터 접한 그림이었으리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발소 그림'이라고 하는것들이 대개는 밀레의 역작중 하나였으니..

그때는 물론 화가 이름을 몰랐을 테고 중학교 미술교과서를 통해서

어릴때 이발소에 걸려있던 그 그림이 밀레의 유명한 그림들이 었다는걸 알고

놀라는 한편, 반가운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은 그때도 밀레에 대해 아는거라곤 그의 그림몇개의 제목만 몇개

외우고 있었을뿐, 밀레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왜 그리도 한가로운 농가의 풍경을

주로 그렸는지에 대해 알수도 없었으며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것 같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상관이 없다라고 느꼈던 탓이었을 것이다.

 

밀레전을 계기로 밀레가 추구한 자연주의가 그대로 배어나오는 그의

전원풍의 그림들을 보며 조금씩 그의 매력에 빠져 들었던것 같다.

한가로운 농촌풍경, 고된노동으로 얼룩진 아낙네의 모습, 추수하는 농촌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앞에서 그림에 문회한인 나 같은 이도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난한 농부들에 대한 사랑이 읽혀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보았던 그림,'낮잠'

배경은 아마도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을 가을무렵이었겠지?

바쁜 추수의 계절, 부부는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일어나 들로 향했을 것이다.

아침햇살이 번지는 밀밭을 헤치며 부지런히 낫을 놀려 밀을 베었을 것이고

아마도 저 낟가리 아래에 앉아 점심으로 싸온 이미 딱딱하게 굳은 검은빵을 먹었을 것이다.

아침에 서둘러 짜온 비릿한 우유가 그들의 음료수 였을까?

 

잠시 졸음이 몰려 왔겠다. 식곤증...

낟가리 아래 고단한 몸을 누이고 깊이 잠든 남편과 아내 이 부부의 낮잠이 평화롭기만 하다.

잠든 부부옆에 그려진 남편의 신발과 두개의 낫에선 그들이 누릴수 있는 '낮잠'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고 얘기해 주는듯 하다.

그리고 그 짧은 낮잠이 참으로 달콤하리란 것도...

그래서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 부부가 자는 짧은 휴식동안

바람은 되도록 불지 말것이며 아무리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라도

노래하지 말것이며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는 되도록 멀리서 들려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밀레가 그린 전원풍의 아름답고 정겹고 사랑스럽고 눈물겹고 성스럽기까지한

그림들중 담박에  마음을 뚫고 내게로 걸어와준 그림, '낮잠'을 오늘 우연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낯선 이국, 그리고 먼 옛날의 이야기속의 낮잠자는 부부가

오늘은 현실로 걸어 들어와 저기 저 추수가 끝난 논배미 한켠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것 같은 햇살 고운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