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추억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리움이 그만큼 충만해져 오는 이유는 아무래도 '가을바람'때문이리라.
하늘이 높아진 만큼 더 많아진 바람이 꽁꽁 닫고 있었던 마음을 노크해오는
때문이 아닐까 그런생각을 한다.
오늘은 강원산간지방에 첫얼음이 얼었다고 했다.
첫얼음이 얼었다는 일기예보를 보며 마음에 한웅큼 차고 맑은 것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계절에 변화에 민감한 걸까?
뭔가를 정리하고 새로이 맞아들이는 그일,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도 말이다.
여름을 정리해야 겠다고 생각하다가
게으름을 피우며 미뤄 두고 있었다. 아이들 옷장부터 정리를 해야 할까 한다.
민소매 티셔츠 와 반바지, 해변가의 추억을 더듬게 해주는 야자수 무늬가 들어간
남방셔츠와 여름동안 체육복으로 입었던 흰반팔소매 티셔츠를 이젠
장농 깊숙이 집어 넣어야 겠다. 내년 여름 다시 그옷들을 꺼내
지난 여름을 추억할때까지.
가을볕 아래 산빛이 깨끗하게 정돈된 산봉우리를 바라보자니
추억의 앨범에 고이 간직한 아름다운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생각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햇살이 고왔다. 장흥유원지엔 우리처럼 가을속으로 여행을 떠나온 연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가족끼리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친구들과 함께온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유독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고 생각하는건 그때 내가 한사람을 가슴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을 따러온 사람들이 한무리 지나가자
장흥유원지에 쏟아진 황금빛 가을햇살 속으로
연인들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첫번째 코스는 조각공원.
조각공원에 세워진 작품들중 유독 생각나는 조각품은 커다란
여인상.. 제목도 생각이 잘 안나지만 조각공원을 드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고 그도 아니면 한동안 그 앞에
서있고는 했다. 유난히 풍만한 가슴을 가진 커다란 여인상이었는데
우리도 그여인상 앞에 서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주는 인상에
조금은 민망해 하면서도 뭔가 풍요로움 같은 이끌림에 한동안 그 앞을
서성거렸던 생각이 난다.
가을과 그 이미지를 연결시켜도 괜찮았을 것이고, 어머니의 이미지를
거기에 연상시켜어도 크게 틀리지 않았을 그 여인상이 아직도 그곳에 건재할지...
문득 궁금증이 인다.
조각공원 뒷편으로 산아래 작은 카페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중 연인들이 한번쯤 꼭 들러야할 커피집이 있었으니
볏집을 이어 엮은 움집 같은 곳에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이 작은 나무탁자에
놓여 있을뿐 주인도 없는 그런 카페가 있었다.
주인은 커피 재료가 떨어지면 채워 줄뿐 좀체 얼굴을 볼수가 없었는데
움집의 한켠으로 비쳐 들어온 자연조명을 빛삼아 둥글게 모여앉아
각자가 알아서 타온 커피를 마시는 그 분위기가 정겨웠던 기억이 난다.
커피 값을 자신이 마신 머그컵을 사는 값으로 대신했던 그집.
그래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그림이 그려진 머그컵을 선물삼아 들고
나오며 그 독특한 커피마시는 방식에 흡족했던 기억이 난다.
장흥유원지, 말그대로 유원지 였으므로 놀이기구도 있었고, 앞서 말한 조각공원도 있어
그곳의 주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 북적거림이 싫어 둘이 손을 잡고 오른 호젓한 오솔길..
흥청거리는 거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연결되던 산길에 난 오솔길이
머리를 곱게 쪽진 할머니의 가르마처럼 단정하게 우릴 맞던 그길이 기억난다.
노래를 불렀던가.. 유치하게도 .ㅋㅋ
다른사람들의 사랑하는 방식을 보면 유치하게 보이는게 사랑이다고 한다지!
그래도 우린 참좋았다. 작은 길섶에 돋은 가을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우릴 반겨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사람들이 덜 복작거리는 그 산길에 접어들자, 늦게까지 밤을 따는 사람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을뿐, 우린 참으로 한적하게 산길을 걸으며 가을냄새에 취하고 있었다.
산구절초며, 산국이 지천이었다.
산국의 향기는 유난히 짙었다. 노란산국이 향기로 불러 들이고,
연보라빛 구절초는 색깔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들꽃들이 지천이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런지.
그가 산에 핀 들꽃들을 꺽어왔다. 노란 산국과 보라색 개미취,
하얀구절초와 노란 마타리 그리고 자주색 엉컹퀴까지.. 그걸 칡넝쿨로
다발을 만들어 내게 바쳤다. 우리 결혼하자고..
(방송국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다. 아니 저건 우리를
따라하는거 아닌가 싶게 정말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었다.)
더 유치해져 버렸지만, 어쨌든 그 꽃다발을 받고 난 행복해져서 그만
그러자고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칡넝쿨로 만든 가을꽃다발, 아, 그속에 이제갓 꽃피울 준비를 하던 억새가
몇개 들어있었구나. 집에 두고 볼때마다 좋았는데 그 억새가 꽃을 피우고 지면서
참 많이도 씨앗을 떨구었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방안에 억새가 틔운 씨앗이
이리저리 날린 흔적이 어지러웠었다.
마지막까지 산국이 향기와 함께 그 꽃다발속에 남아서 오래 오래
장흥유원지 뒷길 그 산 오솔길과 함께 내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던 아름다운 기억...
가을날 햇볕속을 거닐다 햇살이 따가워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
억새풀, 그 속에 사랑을 심어둔 사람은 그래서 가을이면 추억에 젖는다.
사랑을 떠올려 보며 가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