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내 팔자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는 없다. 정말 하늘의 명(命)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가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아니면 삼신할머니가 점지해 주신 바라 해야 옳을까. 꼭꼭 숨겨 놓았다가 우리의 태생에 맞추어 둘을 꽁꽁 묶어 놓았었을까.
하얀 이밥이 지상 최대의 예우라는 믿음은, 차라리 신적 갈구라고 하자. 고들고들 쌀알이 고개를 쳐들어 씨눈을 부라려야만 그게 지극히 잘 ‘지은 밥’이라는 그의 일가견은, 차라리 고집을 넘어선 아집이라 함이 옳지. 자기 말대로 '촌놈'이라서, 가마솥밥 대령하기를 원하니 어찌 당하겠는가. 나는 가마솥이라는 걸 보지도 못하고 시집을 왔으니.
제육은 물기 없이 다글다글 볶아야만 제 맛이고, 보리굴비도 바짝 구어서 타기 일보직전이라야 한단다. 찌개는 당연히 시뻘건 고추장을 풀어서 얼큰하고 매콤하다 못해 혓바닥이 화끈거려야 옳은 맛이라 한다. 음식에 단맛을 내는 것은 솜씨에 자신이 없는 아낙의 눈가림이라네?!
그런데 그이가 선호하는 이 모든 음식이, 나에겐 절대로 환영 받지 못하는 ‘구경감’에 불과하다는 말씀이야. 하얀 이밥보다는 구수한 잡곡밥이 맛도 좋고 영양도 좋지. 고들고들한 밥알보다 솥뚜껑을 열었을 때에, ‘자르르’ 소리를 내는 촉촉한 기름진 밥이 최고가 아니겠어?
없는 살림에 무슨 수로 제육을 달달 볶아서 배를 채우느냐는 말이야. 다글다글 볶다가도 물 한 바가지 휘~ㄱ돌려서, 국물이 흥건해야 부엌의 마누라도 배를 불리지 않겠어? 고추장찌개는 무슨. 청국장찌개도 별미고 구수한 된장국도 먹어야 속이 편안하지를 않겠는가.
또 지금 이 나이에 정장 빼 입고 행차할 일이 있기는 한가. 긴 컴파스에 날씬한 스타일은 누구라도 알아 줄 만은 하지만, 잠깐의 외출에도 정장만 찾으니. 짧은 컴파스에 앙증맞은(?) 케주얼이 나는 보기에 좋더라고 애써서 차리고 나서니, 이건 언제나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구색이렸다.
오늘은 여자주인공이 톤을 높여 고함을 칠 듯한데, 안방의 Tv 앞에 자리를 잡고 보니 아~니 ‘포청천’이 왠말인가. 작은 TV를 돌아보니 벌거벗은 여자 레스러들이 한창 기운을 쓰고 있다.
옷이나 제대로 입고 나오든지 가슴이나 좀 가리고 나오든지. 그걸 좋다고 바라보고 있는 영감이나.
“그럼. 이거 볼 테야?”
그래도 마누라를 불러 앉힐 생각으로 체널을 돌려 세워놓은 곳은, ‘가요무대’렸다. 아니, 그럴라 치면 요새 선풍을 불러일으키는 ‘트롯트’ 프로도 많은데, 녹화한지 10년도 넘은 ‘가요무대’라니.
그래도 신기한 건 본인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입에 맞지 않으면 말없이 물러난다. 간이 맞지 않으면 재주껏 맞춘다. 차려 놓은 음식을 타박하는 예는 없다는 말이지. 누군가는, 애교를 잘 떤다든지 비위를 잘 맞추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나 그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50년을 넘게 같이 잘 살고 있다는 건 신기한 사실이다. 조그만 다툼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안 살고 싶은 적이 1도 없었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그런데 아무튼 여지껏 이렇게 서로 기대며 살고 있다.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고 양껏 먹지 않으면 걱정을 하면서 말이지.
우리는 둘 다 백수가 된 지금도 하루 종일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아간다. 참으로 못 말리는 팔자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영감이랑 다시 한 번 더 살아보고 싶으니 말 다했지. 그때는 매질을 해서라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서 살아봐?. 그동안 기를 쓰고 맞춰 놓고는, 그냥 버리기도 아깝지 않은가? 내 주제에 더 나은 인연은 감당도 안 될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