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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됩니다(글모음)


BY 今風泉 2003-09-01

종그래기로 푸는 옹달샘


■ 자 유

 글쓴이 : 박필

얼마 전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 쓰레기 봉지를 뜯고 있는
작은 강아지를 보았습니다.
흰 스피츠였는데 머리에 리본까지 단
그럴듯한 강아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털은 시커멓고 다리는 교통사고를 당했는지
절룩거리고 있었습니다.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를 생각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강아지 주인집에서 대문 밖을 봤을 때
바깥세계가 환상적으로 보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울타리 안이 답답해 졌습니다.
어느 날 열린 문틈을 통해 바깥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의 기대대로 바깥세계는 환상적이고
가슴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유유히 자유를 만끽하는데
차가 휙~ 하고 앞을 지나갔습니다.   깜짝 놀랐다.
그런데  번번이 차들이 달려듭니다.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파왔습니다
근데 밥그릇이 보이지 않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온몸이 근질거렸으나
샤워를 해주는 주인도 없습니다.
그뿐인가 주인집 침대에서 편안하게 잤는데
이젠 맘놓고 편히 잠잘 곳도 없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강아지가 자유를 찾아 주인집 울타리를 나설 때
그는 참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주인집 울안에 진정한 안식과 자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 안에 있을 때 주님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디고 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울안에 있고자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 당신은 행복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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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줘서 고맙다"

   글쓴이 : 경북대 정충영 교수

하늘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하는 시인 송명희씨는 1985년부터 십여 년 동안 집회활동을 계속하면서 목 디스크를 앓게 되었습니다. 몸은 더욱 약해지고 고통스러웠지만 약속된 집회를 취소할 수 없어 계속 집회를 다녔습니다.

어느 초가을, ■오른 쪽 다리는 돌처럼, 쇠붙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움직여지질 않았고 양쪽 팔목과 손은 감전 상태가 계속되는 그러한 형편■에서 약속된 교회 집회를 나갔습니다. ■겨우 몸을 추서려 한 시간 정도를 달려가 작은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래려 했으나 반 그릇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 교회는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었습니다.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에 그 구석방 교회의 빨간 네온 십자가가 외로이 빛을 비추고 스산한 바람에 낙엽은 흩날리고 몸은 쇠약해져 있는 그 모든 처지가 너무나 가련하고 서글퍼 송 시인은 목이 메어 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래' 가자' 내가 이런 테를 안 오면 누가 오냐!■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개척교회에서 왜 성치도 못한 나를 불러서 이 고생을 시켜?■ 하고 한 바탕 화를 내며 억지로 끌려갔을 갈 수 있었겠지만 그 날은 아프고 가난해진 심정으로 하늘을 처다 보며 송 시인은 "알겠습니다. 갑니다! "하고 설음을 삭히며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와 줘서 고맙다!" 주님이 갑자기 말씀하셨습니다. 송 시인은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그 말씀만 곰곰이 생각하느라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목사님과 성도들인 용기와 은혜를 받았다며 감사를 받았습니다.

송 시인은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고맙다고 해 주신 사람이 없는데 너무나 황송하고 영광스러웠지만 어둠 속에서 차창에 비추인 내 모습을 보면서 오죽이 나 그런 곳을 가기 싫어하고 피 했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정도로 내 자신이 형편없고 한심해 보이기 시작해서 한없이 민망하고 죄송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척 교회와 같은 볼 품 없는 교회를 섬기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고맙다■하실 만큼 귀한 일입니다. 아닙니다. 만약 송 시인이 호화찬란한 큰 교회를 찾아 갔다면 그의 기분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와 줘서 고맙다■란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어렴풋하나마 짐작할 것 같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 머리가 좋아지는 약
  
 글쓴이: 이병욱(bwrhee@hosanna.net)

며칠 전 방송보도에 머리가 좋아지는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NCX라는 유전자로 쥐 실험에서 입증되었다며 쥐의 행동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머리가 좋은 쥐(지능이 우수한 쥐)는 미로를 바로 찾아가지만, 머리가 나쁜(지능이 떨어지는)쥐는 영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 머리가 좋아지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고 머리가 좋아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머리가 좋아지는 약으로 지능이 떨어져 있는 힘든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익하게 좋아지게 함도 좋지만 활용과 적용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혼돈을 초래하게 됩니다
모두 머리가 좋아지면 세상은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여 우리를 지금의 지능과 모습으로 창조하여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많은 문제가 우리의 지식과 지능의 부족으로 생겨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영악하여 생긴 것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 낮추고 더더욱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가 좋아지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착각을 거두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머리가 좋고 나쁜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길 기뻐하실 것입니다.
괜히 머리 좋아지게 하는 약을 계발 시판하여 세계적인 치맛바람을 자랑하는 우리의 부모님과 자녀들이 공부하지 않고 약에 의존하는 인생으로 전락하면 안타까울 것입니다.
우리의 과학이 대단한 경지에까지 접근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지도를 만들고 유전자 치료를 합니다.
암과 같은 불치병을 치료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두 다 아는 것이 늘 좋은 것이고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단은 어쩌면 치료가 가능할 때 가치가 더 빛납니다.
우리가 적당히 모르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명확하게 죽는 날을 알면 우리는 분명 신경쇠약을 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세계가 있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으로 모든 것을 분석할 수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살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혜를 주시지 꼭 머리가 좋아지게 하는 약으로 주실까요?
앞으로 혹시 머리가 좋아지는 약이 시판되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용합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신묘 막측한 세계를 모두 알 수도 없고,
조금 알지라도 과학이 겸손했으면 합니다.

■ 소명받은 자의 바른 자세
 
  글쓴이: 이준구(bibleon@hosanna.net) 본문 : 마태복음 21장 1-11절

1.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를 전심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하던 수많은 군중들이 어떻게 돌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을 서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고심하다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왜 그들이 예수를 환영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함으로 자신들이 이미 변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미 변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환영하니 이제 당신은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환영은 진심 어린 의미의 환영이 아니고 도리어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목적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변화되었고 당신을 이렇게 환영합니다.

이런 유혹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까 ? 그 분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분입니다. 그 분의 소명은 인류구원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 분이 하셔야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면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다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때 소명을 받은 예수님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

오늘은 모든 소명자의 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명 받은 자가 지녀야할 바른 태도 3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첫째 소명받은 자는 없는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2 제자를 보내시며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소명받은 자이신 주님은 꼭 필요한데 없는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명받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소명받은 자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소명받은 자들이 없는 것 때문에 쉽게 소명을 포기합니다.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돈이 없기 때문에, 환경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소명받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두 명의 제자들을 보내서 당당하게 나귀를 구해올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소명받은 자에는 소명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면 필요한 물질은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필요한 지식과 지혜도 자연스럽게 뒤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분명히 믿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물질이 뒤따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질이 따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부족은 사명감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보다 다른 일을 우선하고, 다른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부족은 사명 부족의 결과일 뿐입니다.

물질이 부족하십니까 ? 지식이 부족하십니까 ? 지혜가 부족하십니까 ? 그러면 우선 무엇 때문에 물질과 지식과 지혜가 필요한지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대답하십시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 그 일에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 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3
소명받은 자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이 환영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오늘날 왠만한 유명 가수보다 휠씬 더 강렬한 환영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소리를 지르며 환영하는 사람, 자신의 옷을 깔고 얼굴이 상기된 채 기뻐하는 사람, 울며 박수를 치는 사람, 호산나 소리를 지르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등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서 예수님은 입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열렬한 환영 속에서도 나귀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타는 것이 아니고 짐승이 타는 나귀에서 한 발자국도 내리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나가십니다. 그 분은 사람들의 환영 그 배후에 있는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분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묵묵히 나귀를 타고 그 자리를 지나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모습의 예수님을 상상할 때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 어떻게 조금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가히 경탄이 절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으로 자신이 받은 소명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간사함을 잘 알았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 길에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기 환호하는 수많은 인파들 사이를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쉽게 소명을 포기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우쭐합니다. 소명을 받은 자에게 낙심도 교만도 위험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모두 소명을 잃어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나귀를 타고 묵묵히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반응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였던 것입니다. 사람의 반응은 소명자의 눈을 가립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잠시 물러나서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구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받은 자의 길입니다.

4
소명자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그 분은 환호성에 정신을 잃지 않습니다. 그 분은 군중들이 탄성을 지르면 지를수록 더욱 냉정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래서 그는 눈속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하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분명히 보이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소명을 쉽게 포기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너무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의 길에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라면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5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소명자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소명이 있습니까 ?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 혹시 여러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소명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계시지 않습니까 ?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소명을 향해 걸어갈 때만에 기쁨이 있습니다. 소명이 꺾일 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아파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잡수소서 (요 4:31)

  글쓴이 : 오지붕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셨을 때, 제자들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한 랍비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사마리아 여인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의 세례 행렬이 예수님께로 몰리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매일 함께 그 분을 따라 다니면서 그 분이 랍비 이상의 어떤 범상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 분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 ■랍비여, 잡수소서.■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좋아 보여서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우리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그 분에 대한 고백을 말입니다.

그 분은 결코 랍비들 중 한 분에 불과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늘 부르는 찬양처럼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오시려고 그 먼 거리를 마다 않으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 분께서 수가성 우물가에 앉아 계십니다. 그 분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 잡수소서.■

■ 잊지 말아야 할 것
 
 글쓴이: 이성희(emoksa@hosanna.net)  
 
저는 지금 영국 웨일즈에 와 있습니다. 안식 기간을 맞이하여 이집트의 수도원에 가는 도중에 웨일즈 장로교회의 총회에 초청을 받고 이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한 가지는 웨일즈 장로교회 총회에서 개회예배시 초청자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한 것입니다.
저는 간단히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목사를 파송해준 웨일즈 장로교회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이제는 토마스 목사님이 순교한 자리가 1968년에 북한에 나포된 미국 첩보선인 프에블로가 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지금과 같이 성장하게 된 것이 순교자의 피와 순교자를 파송한 교회들의 덕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들은 저의 짧막한 인사말에 상당히 감사하였고 한국교회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진 듯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며칠 전에 이곳 웨일즈의 한국 참전 용사들이 함께 모인 한국전 휴전협정 50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하여 감사의 말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매년 이때가 되면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모여 예배드리며 전사자와 부상자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도 한국전에 참전한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그분들의 덕으로 이제 한국이 안정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공으로 1988년 올림픽도, 2002년 월드컵도 치를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도 잊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서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의 커다란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 시켰고 한반도의 비핵화가 세계적 안녕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참전용사는 예배를 마친 후에 저에게 "당신은 마치 대사와 같이 연설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우리는 모두 대사이어야 한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그들은 군악대를 앞세우고 부대기를 따라 사열을 하였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들의 사열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란 것은 그들의 이번 모임이 휴전협정 50주년 기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휴전일이 1953년 7월 27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사자이며 알아야 할 저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일을 그들은 알고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얼마나 감사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마 휴전협정 50주년인 것을 기억하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것을 기념하여 예배하는 교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우리는 잊고 그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은혜는 잊고 작은 불평은 잊지 않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흔히 있는 부족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모자람을 보시고 "그 때를 잊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잊을 만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 곁의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그들의 사랑과 덕이 우리에게 용기와 힘입니다.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 눈물 나는 세상

 글쓴이 오지붕

17세 학생이 아버지를 도와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질식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함께 현장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도와 친구들과 PC 방에 가는 것도 마다하고 일을 하던 착한 학생이었는데 이런 참사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가난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가난이 이런 죽음을 불러온다는 것이■

인천의 한 주부가 삼 남매를 데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했습니다. 실직한 남편이 집을 떠나 버리자 파출부 등의 일로 긍긍하던 차에 ■엄마, 나 안 죽을래■라고 부르짖던 아이들을 강제로 동반한 채 투신을 하고 만 것입니다. 원주에서는 30대 부부가 빚 때문에 자매를 목졸라 죽인 후 함께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대구의 한 청년이 대학 졸업 후에 취직을 할 수 없게 되고,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것마저 비관해서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는 기사도 접했습니다. 모두가 눈물 나는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이런 일들이 내 모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나, 이 세상을 더욱 눈물 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없이 영혼의 가난함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니까 소망도 없고, 소망이 없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눈에 눈물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도 울고 계실 텐데■

■코드 맞추기
 
 글쓴이: 이정근(seev99@hosanna.net
 
며칠 전 퇴근 후 컴퓨터를 하는 딸아이에게 마야의 진달래 꽃하고 자두의 김밥을 녹음해달라고 이야기 하였다. 진달래 꽃은 마야의 음색과 가창력이 마음에 들었고 김밥은 그 가사와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나는 노래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18번이라고 할 노래도 마땅치 않아 회식자리에서 80년대 초 그룹 사운드들이 부르던 노래 몇 곡을 부를 뿐이다.
특히 가족들과는 노래방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아이들이 보기에는 퍽이나 재미 없는 아빠가 문득 자신들 세대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하니 퍽 신기해 하였다. 덧붙여서 왁스와 빅마마의 노래 몇 곡을 함께 녹음해 달라고 하니 딸아이가 신이 나서 잘 녹음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아이의 눈에는 차 안에서 늘 복음성가와 설교 테이프만 듣고 다니는 듯한 아빠가, 자기들의 세계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함께 듣고 좋아한다는 것은 요즈음 말로 자신들과 코드가 맞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노래들을 녹음까지 하면서 들어야 하는 매니아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코드를 맞추기 위한 나름대로의 계산에서 나온 의도적인 행동이다. 진달래 꽃에 대하여, 마야라는 가수의 외모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중학교 2학년인 딸과 대화를 이어가고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이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섬길 교회를 찾은 사람들의 기준은 설교 말씀과 교회시설 및 규모, 예배 분위기 등이다. 그러나 진정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이유는 이러한 것보다 아주 사소한 감동이 결정적인 경우가 많다. 데리고 온 아이들에 대한 배려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함이 이들의 발을 붙잡을 수 있다. 좋은 식당이나 유명한 호텔 직원들의 서비스는 손님에 대한 충분한 감동을 주고 로열 고객화 하듯이 말이다. 비록 그것들이 계획된 인위적인 것들이지만........

겨우 두번 방문하였는 데 아이이름을 정확히 부르며 안아주는 나이 지긋한 남자 집사님, 금방 도착하여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성경책 옆에 놓여 있는 따뜻한 녹차 한잔, 가장 연세 많으신 어른이 꼭 잡아주시는 손길과 맑은 미소, 화요일 오후에 지나다가 잠깐 들렸다는 전도사님의 아주 짧은 방문, 교회방문을 환영한다는 또박또박 써내려 간 여전도회장님의 정성스런 엽서 한 장이 교회의 가족을 만들 수 있다.

전도를 하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모두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커뮤니케이션이며 이들의 기본적인 것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고 코드를 맞추는 것이다. 나아가 코드를 맞춘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 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느 것에 감동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들을 절대 교회에 정착시킬 수 없다. 어차피 그들에게 우리의 코드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코드를 맞출 수 밖에 없다. 그게 인위적이고 계획적인 것일지라도■.
 
■가장 소중한 것 (마 13:44-45)
 
 글쓴이: 김진홍(dooraekim@pastor.hosanna.net)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갈 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값어치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150년 전에 덴마크에서 살았던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란 철학자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지금 문을 닫고 하나님 앞에 앉아 기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이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하신 그 이웃이 바로 그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하나님을 만나 자기의 삶이 본질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이라 하였습니다. 19세기 중엽에 세계는 격동기의 시대였습니다. 사회주의가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문을 쓰던 때에 키에르케고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면서 이르기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이웃 사랑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지 죄인들이 그렇게 단결한다고 하여 세상에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3장 44-45절에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진주 장사가 자기가 원하는 최고의 진주를 만나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산 장사꾼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요즘같이 혼란스럽고 분열되고 바쁘기만 한 시대에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지를 바로 깨달아 그 일에 자신의 모두를 투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따라 지금은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앉을 때입니다.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앉을 때입니다. 그 자리에서 만난 하나님이 이 시대의 희망이요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이십니다.
 
■ 이 모습 이대로 당당하게
 
 글쓴이: 이병욱(bwrhee@hosanna.net)
 
며칠 전에 벤쿠버 코스타 집회를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많은 유학생들과 강사님들과 주님안에서 귀한 은혜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교민 탁 집사님댁에서 강사 숙소로 집을 공궤했습니다.
그 곳에서 동안 교회 김형준 목사님, 온누리 교회 박인용 목사님과
곽수광 목사님과 송정미 사모님, 찬양사역자 최인혁집사님,
그리고 65% 화상으로 기적적으로 하나님안에서 새 삶을 사는 이 지선양과 모친,
나중에 동양선교교회 강준민 목사님과 같이 며칠 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참 재미난 사실은 이 지선 자매가 자신의 예쁜 얼굴을 화상으로 인해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얼굴임에도 전혀 아랑곳 없이 밝게 생활하고 농담도
곧 잘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정도의 상처면 의학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할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밝고 맑게 웃고 생활하는 모습으로,하나님을 찬송하는 감사를 드리며
왜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메세지로 인해 우리 모든 강사님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11번의 수술과 죽음을 넘은 고통과 갈등을 견디어낸 그 아름다운 의지인
지선양은 이제는 화상환자가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 건강하고 의젓한 사회인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는 사역자였습니다.
같이 먹고 마시며 생활을 하였지만 티없이 맑고 주님의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한 모습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니 그 헤맑은 얼굴이 오히려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 삶 자체가 바로 우리 주님의 메세지가 되어 많은 유학생들과 교민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저 마다의 개성있는 예쁜 우리의 얼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유명 스타 연예인의 모습으로 성형 수술하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획일적인 모습과 사고에 까지 생각이 미치니 같은 동시대를 사는 젊은이로서
지선양이 던지는 메세지가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남에게 예쁘게 더 잘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이 다 있습니다.
특히 이성간에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이성간에 서로 교제 하는 기간에 되면
무척이나 외모에 신경을 씁니다. 남자는 우뇌반구가 발달되어서
시각과 미각과 후각에 예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매들은 화장을 하고 향수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데이트를 하다가도 배고픔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의 마음은 배(?)에 있다고도 합니다. 잘 먹고 속이 든든하면 여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여자들은 좌뇌 반구가 발달되어서 청각과 촉각에 예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속사귀는 말과 자극적인 터치에 약한가 봅니다.
어찌되었건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가 선을 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의식없이 성형수술을 감행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된 왜곡된 미인상과 외모지상주의,외모 콤플렉스등등이
성형수술을 조장하는 면도 있습니다.
사실 성형수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상이나 치명적인 신체 부위의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인해 재활의학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피해와 이상을 방지하고자는 면에서,
또 자심감과 사회성의 회복을 위해서도 성형수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적인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고 사랑한다면 구태여 우리의 한 번 뿐인
육신에 많은 생명과 투자를 해야하는 지 생각이 되었습니다.
예쁘지고 싶은 욕망은 이해가 되지만 우리에게 지금 당장에 더 소중하고 더욱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선이 처럼 자신의 모습에 보다 더 당당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우리의 인생이
더욱 아름답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가 성형수술을 하고 난뒤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뵈옵고 혹시'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인사했을 때
변해버린 얼굴로 우리를 못 알아 보신 하나님께서 '너 누구니?'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로 인해서 오늘도 감격하며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면 좋겠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편139편14절)

우리의 이 모습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드립시다.
지금 우리의 이 모습 이대로 당당하게 삽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리의 지금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에...

■ 창살 없는 감옥
 
 글쓴이: 양승훈(shyang@hosanna.net)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하는 중에 서울대학교 내 어느 소형 강당에서 ■전공의 제사장■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70여명 정도의 참석자들 중에는 학부 학생들도 몇몇이 있었지만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많았고, 교수님들도 상당수 있었다. 강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세계관 일반에 관한 것 중 학문적 소명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이나 학자들이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자신의 학문 영역에서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왕 같은 제사장적 소명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처음에는 세계관에 관한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후반부에서는 특히 서울대인들이 가져야 할 소명에 대해서 몇 가지를 얘기했다.

끝 부분에서는 서울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이렇게 강조했다: ■이 캠퍼스 내에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므로 여러분들은 자신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선발된 사람인지 잘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수님들은 서울대 졸업생들 중에서도 적어도 5% 내에 드는 분들이므로 정말 천 명, 만 명에 한명 꼴로 선반된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적 소명에 대해서 말할 때 저와 같이 경북대를 나온 사람보다 여기 계신 서울대를 나온 분들이 이런 일을 한다면 얼마나 더 효과적이겠습니까!■

나는 정말 서울대 출신들 중에서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의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큰 버팀목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강의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대학과 학문의 세계에서 제사장적 소명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내가 오랫동안 서울대 열등감을 갖고 지내온 세월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면서 내가 정말 서울대 열등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나는 점촌에 있는 문경중학교를 거쳐 문경종합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이 학교가 문경공업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문경군 관내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문경종합고등학교에는 광산과, 건축과, 토목과 등 실업계 학과들과 더불어 인문과라는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학업성적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문과를 다니면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1, 2학년 성적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를). 하지만 지방 종합고등학교라는 것이 그렇듯이 내가 졸업하던 그 해 우리 학교 졸업생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4년제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나 한 사람 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예년의 실적에 비해 저조한 진학률이었으며, 같이 졸업한 친구들 중에도 1년 후에 재수해서 대학을 간 사람들은 있었다.

4년제 대학을 합격했다고 내가 서울대 법대나 경북대 의대를 합격한 것은 아니다. 경북대 사대 물리과를 간신히 합격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한 것도 아니고 20명 정원에 21등을 하는 통에 후보 1번으로 합격했다. 다행히 1차 합격자들 중에 몇 사람이 다른 특차 학교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나는 내 실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 덕분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후보로 대학에 입학한 주제에 4년 뒤 대학을 졸업할 때는 간도 크게 KAIST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말 할 것도 없이 시험 결과는 보기 좋은 낙방이었고 (군대 문제가 걸려 있어서) 나는 도리 없이 재수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가 없어서 재수를 한 것이 아니라 실력이 없어서 재수를 했다. 그리고 재수한 후에도 느끈하게 합격한 것이 아니라 간신히 합격했다.

하여간 수석으로 불합격한 것보다는 꼴찌로 합격한 것이 훨씬 나았다. 이처럼 문경 촌놈이 ■승승장구■를 했으니 사람들은 이 때쯤 내가 대단한 프라이드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시골에서 종합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소위 일류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들이 다니는 대학은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저 천국■의 세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의 힘으로 합격했지만 어쨌든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웬 열등감이 그처럼 심하게 몰려오는지... 원래 감정적이고 경쟁적인 성격의 사람이 도회지에 나와 유학을 하다보니 시골 논밭을 쫓아다니면서 일 할 때는 상상도 못하던 열등감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잘 난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열등감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공부하러 간 후에도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경북대는 지방대학의 하나라고 해도 KAIST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탁월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KAIST에는 나보다 훨씬 더 탁월한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후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아도, 그리고 경북대 교수가 되어도 열등감은 귀신처럼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을 사는 것과 같았다. 이 감옥에는 검사의 기소도, 판사의 논고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종신형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간수도 없고 감옥의 높은 담도 없지만 열등감은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열등감을 갖고 사는 것은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이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사는 것과 같았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이 열등감의 감옥 속에서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될 수 있었다.

학력 열등감이 사라진 것은 내가 KAIST를 졸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도 열등감은 여전했으니까. 아내가 경기여고-서울대, 소위 KS 출신이기 때문도 아니었다(자랑을 용서 바람). 똑똑한 아내를 만나 불같은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지만 결혼을 한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나는 이 열등감의 늪에 빠져 지냈다. 결혼 초기에는 때때로 아내에게조차 열등감을 가질 때가 있었다. 그 후 나는 괜찮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연구 업적도 쌓이고, 몇 권의 책을 쓰서 사회적으로 좀 알려진 인사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때마다 나름대로 열등감을 느낄만한 더 탁월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때 쯤에는 외국의 유명한 학자들까지 나의 열등감의 귀퉁이에 슬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열등감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쯤 되는 곳으로 후퇴하여 참호를 파고 숨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열등감이 에이즈처럼 잠복하고 있었다.

내가 열등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결정적인 계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탁월한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도, 베스트셀러 책을 썼기 때문도, 어느 대학 총장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년이 보장된 경북대 정교수직을 사임하고 VIEW 사역을 위해 밴쿠버로 떠난 것 때문이었다. 대학에 사표를 제출하고 난 후에는 이제 나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의 교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인도 아니었다. 월급도 이전에 국립대 교수로서 받던 것보다 절대 액수가 훨씬 적다. 물론 외적으로 DEW로부터 파송을 받아서 현재의 일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지금의 포지션은 내가 만든 것이요, 월급 수표도 내가 내 손으로 사인을 해서 내 지갑에 넣을 뿐이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기약이 없는 포지션이지만 이상하게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을 버리고 나니까 열등감도 동시에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의 감옥 속에 살고 있다. 예수를 잘 믿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열등감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들 중에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의과대학을 나와서 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학벌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열등감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생겨난 보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한국처럼 ■단선형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쉽게 순번을 매길 수가 있고 따라서 쉽게 비교가 되는 사회, 일등은 물론 분명한 꼴찌가 있고, 꼴찌는 모든 면에서 일등에 비해 열등하다는 취급을 받는 사회에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단일 가치를 추구하게 되니 쉽게 서열화가 되고 비교가 된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벌이다.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발견하는 놀라운 점은 학력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지니까 학력 우월감도 사라져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열등감과 우월감은 손바닥의 앞뒷면과 같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학벌에 대한 열등감과 더불어 돈과 명예, 지위 등에 대한 열등감도 대부분 없어졌다. 그래서 일류대학을 졸업했다고, 좋은 책을 썼다고,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휴가 때 캠핑 가서 텐트 속에 비싼 자개 장롱 사다 놓고 오픈 하우스 하는 것처럼 싱거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게서 학벌 열등감이 없어진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한 두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우선 학벌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학벌이 차지하는 비율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좋은 학교를 나온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도 종종 보면서 학벌이라는 것이 인생을 인생 답게 살게 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좋은 학벌이나 지적인 똑똑함 등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섬길 의무가 많음을 의미할 뿐이다.

다음에는 인생에는 학벌 이 외에 정말 귀중한 다른 것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세상에는 학력이나 학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 많다. 성실, 겸손, 정직, 신의 등은 학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다. 또한 육체적, 정신적 건강도 학벌보다는 훨씬 더 귀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고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다른 어떤 것들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귀중함을 실감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7-1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한다면 학벌은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였다. 자신이 팔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이나,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족속이라는 점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빌3:5-6).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하게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열등감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을 두고 이렇쿵 저렇쿵 하는 것을 보면 도토리 키재기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열등감은 사탄의 속임수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훨씬 더 귀중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우리가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보시기에 좋도록 만든 인간이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머리가 좋고 나쁨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의 기준이 아니다. 아무쪼록 이 글이 이전에 나와 같이 선고 받지도 않은 종신형을 살고 있는 재소자들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030719/030721

■ 부담과 특권
 
 글쓴이: J.B.Oh(mt13@hosanna.net)

대통령과 함께 생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뿐 아니라, 대통령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가운데 매일매일을 사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삶이 시작할 때부터 특권보다는 부담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대통령과 함께 살기 때문에 그 생활 환경은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통령의 상에서 먹고 마시기 때문에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음식을 대하며, 육, 해, 공군이 지키는 까닭에 늘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입니다.

그림을 잠시 바꿔서 대통령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가정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특기인 거짓말도 못하고, 정말로 즐기는 남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편안하고 풍성하게 살기 위해서 남의 것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삶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부담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값진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되며, 그 분께서 지키시는 까닭에 물과 불 가운데로도 안전하게 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 43:2).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그 분께서 친히 준비해주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특권마저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히말라야의 장수왕국 - 자연식과 정신 건강 
 
'150세까지 살 수 있다'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는 러시아의 유명한 장수 학자 보코모레쯔 박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장수의 비결을 찾아 헤매며 장수촌을 누비던 어느 날, 길가에서 울고 서 있는 80세 가량의 노인을 발견하고 이유를 물은 즉 그의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었다. 이 노인의 아버지는 몇 살쯤 될까 궁금하던 끝에 노인을 데리고 집을 찾아가니 113세의 건장한 노인이 나와서 자기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질러 매를 때렸다는 것이었다. 또 무슨 할아버지가 있나 싶어 집안을 둘러보니 143세의 또 다른 노인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아들의 종아리를 때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기는 하지만 위의 일화는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현대의 장수국으로는 일본, 스웨덴, 덴마크 등이 유명하지만 국지적으로는 러시아의 코카사스 지방, 히말라야의 훈자왕국, 남미 에콰도르의 비루가밤바가 3대 장수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중 코카사스 지방은 지역적으로 넓어 연수의 제약이 많은 곳이고 비루가밤바는 과장된 부분이 많아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장수의학자들이 장수의 요인을 찾아 나설 때에는 학술적으로 인과관계의 파악이 용이한 훈자왕국을 찾아 간다. 벌써 몇 차례의 조사단이 파견되어 조사결과를 학회지에 발표한 바 있다. 하키스탄, 인도, 중국에 둘러싸인 히말라야의 영봉 카라코람 산배그 유명한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지나가는 한쪽 귀퉁이에 훈자왕국이 있다. 이 나라는 주민들이 놀랄만큼 건강하여 60세가 되서야 어른 대접을 받으며 100세 이상의 장수자는 보통이고 120세 이상의 장수자도 여러 명 있다는 있다는 것이다.
여러 연구팀의 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공통적으로 이들의 특징적인 식생활을 장수요인으로 꼭고 있다. 한 마디로 훈자인의 식생활은 천연적인 자연식이다.
물은 바위 틈에서 흘허나오는 미네랄이 풍부한 광천수를 식음(천천히 마심)하고 있고 곡식으로는 도정하지 않은 통곡식(통밀, 옥수수 등), 신성한 채소와 과일, 살수씨를 포함한 씨종(비타민 E가 풍부함), 살구씨 기름 등을 즐겨먹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리핀 박사 등은 이들 중에는 암 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이들이 즐겨먹는 식사(특히 살구 씨)에는 미국인의 식사에 비해 비타민 B17이 200배 이상 높다는 점을 들어 비타민 B17의 항암 작용에 대해 책을 저술한 적도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리까지 이들이 한결같이 친절하고 온유하며 맑은 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나라에는 정미소나 제분소가 없을 뿐 아니라(곡식을 도정하지 않기 때문에) 병원도, 약국도, 경찰도, 교도소도 없다고 한다. 이쯤되면 천연식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식생활과 두뇌 건강을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의학 조사 단장으로 훈자왕국을 방문했던 영국의 맥카리슨 박사는 이와 같은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인도의 국립영양연수소장으로 재임 시 많은 동물 실험을 통해 자연식과 두뇌 건강의 깊은 관련성을 증명한 바 있다.
식사의 내용이 성격을 좌우함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편식하는 사람의 허약한 몸과 신경질적인 성격은 식생활과 두뇌 건강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물론 순진무구한 마음씨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깨로는 뱀같은 지례롸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기질이 필요할 때도 만다. 그러나 세상은 힘쓰고 애써 안되는 일이 있는 법. 될 수 있으면 자연 그대로의 천연식이 좋지 않을까?
인공 식품의 섭취를 줄여 두뇌 건강을 유지하자. 

■ 스포츠 음료, 정말 좋은가 
 
미용과 건강을 위해 신체를 활성화시키는 비법 중에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 물을 이용한 방법이다. 즉 내부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생수건강법(하루8잔), 외부에서 자극을 주는 방법으로 목욕법(온욕, 온냉교대법, 냉수마찰, 찬물에 발담그기), 외부에서 내부의 물을 자극하는 원격조정법(자기, 원적외선 사우나)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좋은 물이란 깨끗한 물, 산소와 미네랄의 함유량이 많은 물로 알려져 왔으나 요즘에는 물을 이루는 분자집단의 구조나 크기가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육각수(생수)가 좋다는 것은 구조의 문젱, 알칼리 이온수(작은 분자집단의 물)가 좋다는 것은 크기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즉 생수는 끓인 물에 비해 미네랄이 많으며 물의 온도가 낮으면 산소함유량이 높아진다. 알칼리 이온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칼슘등의 미네랄이 많은 물이고 자기화된 물이 작은 분자집단의 물에 속하므로 결국 건강에 유익한 물은 산소와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된 물이라는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계적인 장수촌의 대표적인 특성 중의 하나가 광천수(암반을 뚫고 나온 미네랄이 풍부한 물)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칼슘등 미네랄이 풍부한 물을 식수원으로 공급하는 지역에서 심장병, 뇌졸중 등 성인병의 발생이 현저하게 낮다는 많은 연구결과가 좋은 물의 임상적 효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최근 '마시는 링거액'으로 각광을받고 있는 스포츠음료에 대한 학술적 평가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스포츠음료는 격심한 스포츠나 등산, 훈련, 작업, 목욕 후 땀을 많이 흘렸을 때와 음주 후 수분과 미네랄이 다량으로 빠져 나갔을 때 이를 보충하여 체내 불균형을 신속하게 교정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음료는 약알칼리인 체낵과 농도가 비슷해 물보다 4배가 흡스가 빠르다는 현상으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대로 생리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꼭 필요한 시기'에 '적정량'을 마시는 것에는 이의를 달 수가 없다.
문제는 값비싼 스포츠 음료가 특수한 상황에서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일반음료'로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즉 일부업체들이 광고매체를 통해 '스포츠음료=건강음료'라는 해괴망칙한 결론을 무의식적으로 주입하고 있고 불행하게도 소비자들이 이에 말려들고 있다.
이러한 스포츠음료의 과용은 쉽게 표현하자면 설사 등으로 수분과 미네랄이 빠져 나가 탈진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링거액'을 자체 회복기능이 황성한 정상인에게 주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스포츠 음료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만 마셔야 한다. 그리고 승부욕이 개입된 격심한 운동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정말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면 스포츠음료를 마셔야 되는 상황, 즉 체액균혀잉 깨지는 시점에 도달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정상인이 건강음료로 스포츠 음료를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즉 스포츠음료의 주성분인 나트륨이 과다하게 흡수되어 순환기능에 변화를 일으켜 신장과 심장에 쓸데없는 부담을 주게 된다. 마치 심심해서 소금을 자주 집어먹는 것에 해당된다고 할까.
이러한 음료의 남용은 체온조절기능을 비롯한 신체의 기능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리고 피로회복을 방해하며 특히 고혈압, 뇌졸중 드응■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땀을 흘린 경우에도 노약자가 아니라면 인체가 가진 자체회복기능을 신뢰하는 의미에서 생수를 마시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생수가 스포츠음료에 비해 흡수가 느리고 회복이 느린 것을 사실이나 건강에 자신이 있는 분이라면 굳이 '외부영입'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필자의 경험으로는 운동이나 목욕 전 미리 생수를 마시는 것이 체액의 불균형을 미리 예방할 수 있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스포츠 음료는 꼭 필요한 시기에 적정량 마셔야 한다. 그러나 깨어진 체액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는 잠깐의 휴식과 더불어 생수 한잔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

■ 모자 공장에서 염색 일을 하며, 정권사님 댁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토요 청년모임에 처음 나왔는데 사투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말이 좀 어눌해서 말끼를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왠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선 성도들끼리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안부를 묻기도 하며 반갑게 악수를 나눈다.
내가 집사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저 쪽에 그 청년이 보였다. 혼자였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몇 번을 두리번거렸다.
"저 청년과 인사좀 해야겠구나.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다른 분과 인사를 하느라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찜찜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 놈, 나쁜 자식이에요"
권사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제 밤,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채 극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단다.

공장의 열악한 작업환경이 힘들었을 것이다.
초라한 외모에 열등감이 있었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학력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적은 월급에 생활이 쪼들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객지생활이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고통을 위로해줄 따뜻한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적어도 교회만큼은 그런 사람이 많은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찾아가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내가 그 청년을 죽게 했다.

둘러보라.
극약을 사다놓고 마지막 실 가닥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기다리는 또 다른 자살예비자가 있는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5

■ 환란과 좌절속에 숨어있는 생명의 길

 ( 벧전1:13-25 ) NO. 2

필립 부룩스(P. Blooks) 목사는 보스톤의 트리니티 교회의 목사로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트리니티 교회는 교회앞에필립 부룩스목사의 동상을 건립하여
주께 향한 그의 헌신과 충성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섬기던 교회 앞에 동상을 세울만큼 교인들에게 감명을 크게 준 목사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 부룩스의 꿈은 교사가 되는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고, 교사가 되어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교사의 길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그는 비두나아의 꿈을 가졌으나 비참하게 좌절당했고 드로아의 환상 가운데 목사로서의 새길을 발견하고위대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 소설 「성채」의 저자는 A.J. 크로닌입니다.
그는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의사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그만 시골에서 좌절과 고민 가운데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글이 너무 보잘 것이 없어 사람들 앞에 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후에 그는 던져버렸던 그 원고지들을 억지로 다시 주어 모았습니다.
드디어 그 글이 「성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책은수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명을 주는 책이 되었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책이 되었습니다.
그의 비두니아는 비참하게 좌절되었으나 드로아에서 세계적인 작가로 다시 출발하였습니다.

다음은 「성채」의 한 부분입니다.
그의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 맨슨가가 끝나는 곳에 교회의 문이 열려져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다시 한번 사로 잡혔다.
교회 안은 어둡고 텅비었으나 따사로운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
예배 끝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교회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는 다만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히 앉아서 휘장으로 둘러싸인 강단 뒷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잘 알지도 못하는 이 교회에 들어와 있었다.
환난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나 보다.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가 보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다.

기도 : 환난과 좌절 속에서도 생명의 길을 예비하시는 주님.
실패와 고난 속에 숨겨 놓은 하나님의 영광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게 영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 멘

■ "탈무드 황금률 방법" 중에서

(이희영, p.251-252, 동서문화사)
"하나님은 태초에
단 하나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했다.
왜 처음부터
10명, 100명, 1000명의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한 인간을 죽이면
모든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전도 애국입니다.
 
 글쓴이: 이병욱(bwrhee@hosanna.net)

제가 근무하는 병원이 강남 논현동에 있습니다. 유흥가 밀집지역이어서 술집이 참 많습니다.
헤어샵과 유흥 음식점 등등 젊음이 살아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젊음은 가끔은 염려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밤새도록 술이 취해 토하는 자매,
차를 잡기 위해 추태를 부리는 술 취한 형제들, 형제의 등에 업혀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아슬아슬한 자매들까지 출퇴근길에 술 취한 젊은 형제들과 자매들을 어김없이 만나곤 합니다.
오늘도 이른 아침 출근길 음식점 앞마당에서 술을 기울이는
두 쌍의 청춘 남녀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밤부터 새벽같이 놀다가 아침이 되니 소위 해장술을 하는가 봅니다.
그 젊음의 발산과 건강함이 부럽기도 하고, 무슨 고민이 많아서 저렇게
젊음을 불태울까 생각하니 참 측은하기도 했습니다.
한창 일하고 공부하고 미래를 설계하며 지내야할 나이라고 생각하니
걱정도 되었습니다. 집에라도 들어가지 않고 외박하면 부모님들이 얼마나 걱정하시겠습니까?
늘 고민하다 저희 병원을 찾는 술집에 근무하는 자매들만이라도
전도해야겠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진료를 보는 이 선생님께
다 기도해 드리고 전도하시라고 말했습니다.
미워하기보다 철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사랑합시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입니다.
아직까지 잚음의 끼를 발산하고 집중할 정확한 타겟을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비틀거리는 그 속에 미래의 주님의 일군들이 숨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저렇게 되지는 안았을 것이며,
아직도 희망과 소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많은 젊음은 비교적 건강합니다.
품어주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전도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도하면 저렇게 까지는 지내지 않을 터이고,
앞으로 우리 나라를 위한, 주님 나라를 위한, 미래를 위한 귀한 투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도 애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거창한 일로 애국을 꼭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방황하며 탕진하는 젊음을 건강한 가정으로,학교로, 건전한 일터로,
주님의 아름다운 교회로 돌아가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일 또한 애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밤 문화에 젖어 밤새도록 젊음의 축복을 거꾸로 누리는 청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 이 시대의 귀한 주님의 일군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매월 첫 째 주 금요일은
'방황하는 젊음을 위해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섬겨봅시다.
 
■ 당신은 정말 똑똑하나요..
 
 글쓴이: 김학중(khjsas@pastor.hosanna.net)
 
요즈음 사람들은 매우 똑똑하다고 자처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부분에서는 아메바보다도 더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엉뚱한 대상을 숭배하고 따르는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특정 대상을 영웅으로 만들고 그 대상을 숭배하고 따르고 추종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이단이 탄생하고 사이비 집단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이비교주나 이단을 제쳐놓더라도 일반 보통 사람도 한순간에 스타로 만들어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어서 빨리 모셔서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일약 스타가 된 사람이 전국 강연회나 세미나에 불려다니고 졸지에 부자가 되는 현상들을 보면 인생역정의 승리라는 부분에서 그 스타가 된 사람을 칭찬할 수도 있으나 그를 무조건 추종하고 떠받들고 따르는 것을 보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대학가 중국집 배달원에서 일약 '스타'로 부각돼 기업체나 관공서에 출강하는 등 성공시대를 열었던 일명 '번개'가 10년 가까이 타인행세를 해 오다 덜미를 잡힌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씁쓸합니다. 한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서 그의 말이면 무조건 추종하고 모든 기업체나 단체에서 그를 모시느라 많은 돈을 주어가며 혈안이 되더니 그를 모신 것이 기업의 영광으로 알더니 그와 사진찍은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더니 그의 실체는 허상이었던 것입니다..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차라리 후련합니다. 아이들의 호적도 제 밑으로 올리고 이제 떳떳한 아빠로 살 겁니다"
그동안 떳떳하지 못한 인생임을 스스로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자신을 신처럼 모시는(?) 어리석은(?) 지성인들을 향해 무수히 많은 성공전략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10년 가까이 남의 이름으로 살면서 죄책감에 시달려온 그는 지금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그사람 뿐아니라 어리석은 이 세상의 모든 똑똑한 사람들도 함께 고개를 떨구어야 합니다
그는 지난 10년전 자신이 일하던 중국 음식점 계산대에서 훔친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최근까지 만인이 다 아는 스타낙인이 찍힌 '조00'이란 이름으로 행세해 왔습니다.
그는 한달에 1천만원에 이르는 수입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름으로 너무 유명해진 자신을 발견하자 자수는 고사하고 두 명인 아이의 호적도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부인에게 올리는 등 불안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불안한 삶을 추종하는 세상.. 진리가 없고 붕괴되는 세상에는 허위가 판을 칩니다. 아무리 인생역전이라는 칭찬할 점도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이 시대가 만든 불행한 사람의 모습이지만 그를 영웅으로 만들고 그를 어디서나 모셔서 그 성공 전략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쫑긋 세운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 집니다. 그렇게 잘난 사람들이 참 진리이신 하나님은 우습게 여기고 멋대로 살면서 특정 인간을 스타로 만들어 추종하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똑똑한 사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참 진리이신 그 분이 웃으십니다. 당신은 정말 똑똑 하나요.

■ 수련회. 그 화려한 여름의 중심이여

 글쓴이: 이민욱(hismind@hosanna.net)

젊을때의 여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100만불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미 10년이 지난 과거지만, 내게 있어 20대의 여름은 특별했다.
1988년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행사 앞에서 함께 들뜬 철없는 대학 1학년생은
이내 형식적인 교회 수련회를 끝으로 향후 몇년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예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10대때의 교회 수련회가 자초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때의 수련회는 내게 무거운 부담감의 자리만을
기억하게 해준다. 일정한 싸이클 처럼 반복되었던 여름 수련회의 3일밤. 여름 수련회의 마지막 밤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어떤 무언의 요구앞에 서야만 했다.
그리고 그 요구는 이내 나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의 목소리를 가져갔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제 목소리가 나는 사람들을 슬며시 째려보는 이른바 쉰목소리 합창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까지는 봐주더라도 3일밤에는 무언가 결판을 보아야 하는
그 이유로 인해 우린 모두 다 쉰목소리가 되기로 했다.
못박히신 예수님 십자가 앞에 다 모여 그동안 지었던 죄를 다시 다 회개하고
내가 왜 우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지 못한채 목이 쉴때까지 고함을 지르곤 하였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것 하나.
나는 도합 6번. 예수님을 새로 영접했다.
...
그렇게 6년을 지나, 대학부 수련회를 갔지만 별반 다른 무언가를 느끼지 못한채
군대를 가기전까지 2번의 수련회를 그저 그렇게 다녀왔다.
군대를 갔다온 그 해. 옮겨 다니던 교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수련회를 계획했다.
그것은 수련회가 아닌, 여름 전도여행이었다.
94년. 대학의 마지막 4학년 여름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할 참이었다.
수련회를 가기전까지 단 한번도 준비모임에 가지 않았던 나는 해외를 가는 이유로
적어도 5번 이상의 준비모임에 가야만 했다. 기초 중국어를 배우랴. 처음 타보는
국제선의 에티켓까지.. 준비모임은 가고싶은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참 많이도 했다. 얘네들이 이렇게
뜨겁게 기도하는 애들이었다니.. 그 감격은 고국으로 돌아오자 마자 국내버전으로
이내 돌아왔지만 그래도 수련회 싸이클 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은 이내 내 삶을 바꿔 놓았고
수련회의 의미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여름을 새롭게 보게 되었을뿐 아니라
주님도 완전히 새롭게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최근 몇년간 여러 지역교회의 다양한 수련회와 outreach에 동참하였다.
찬양도 아닌 싱어롱도 아닌 그런 시간을 보내는 교회가 아직도 많지만,
주님은 시대를 변화시키신 것 이상으로 지역교회의 수련회도 변화시키셨다.
지난 겨울 이틀간의 특강차 방문했던 서울 은평구의 E교회. 2박3일간의 중고등부
수련회의 주제는 예배였다. 주제 구절은 요4:23-24였으며 오전에 그 주제구절에 맞는
강의 제목으로 2번의 시간이 주어졌다. 오후에는 각종 예배관련 비디오가 상영되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저녁시간이었는데 그들은 이틀동안 저녁 내내 기도와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그램을 알리는 벽보에는 저녁식사시간 이후로 찬양과 기도외에는
아무것도 없슴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한 담당전도사님의 고백은 놀라웠다. "저도 안될줄 알았어요. 그리고
몇번의 고비가 있었죠. 아 지금 내가 나가서 인도를 할까.. 그런데 만약 그렇게 했다면
모든게 수포로 돌아갔을 거에요"
아이들은 4시간이라는 찬양과 기도의 시간을 훌륭하게 지나갔던 것이다.
중간에 몇번 나가서 뭐라고 멘트를 해야만 할것 같은 그런 유혹을 전도사님은
참고 성령께 의탁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시간을 맞았다.
흠..

요즈음의 수련회 아직도 많은 교회들은 적당히 놀고 적당히 공부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짜는 것 같다. 많은 직장인들이 있고 그들은 쉼을 원한다.
그런데 뭐라할까..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게 어정쩡한 수련회에는
큰 역사를 경험할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 내내 앉아서 다 유두고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군포의 K교회는 이번 여름 처음으로 각 지역 국내 전도여행을 간다.
이렇게 해도 좋을듯 싶다.
각분기별 수련회를 예배와 영적전쟁 중보기도로 구성해 3일간 집중적으로
그 분야에 대한 이해와 실제적 적용을 쌓는 것이다.
내 개인적 예배의 성장을 도왔던 몇년전의 겨울 인터쿱 비젼캠프에서
그해 12월31일 1월1.2일간 나는 진정으로 열정적인 한 예배자를 발견했는데
그는 연말 특박을 나온 장병이었다.
3일내내 군복을 입고 예배와 캠프에 참여한 그는 진정으로 건강한 영적 군사였다.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에게 주님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일중심의 성향을 가진 사역자들이 머쓱해 하는 그런 강해를 말씀하신 것일까.
적어도 내 생각엔 마르다를 주목하게 하시기 보다는
가장 좋은 어떤것을 빼앗기지 않는 기쁨. 그 기쁨을 소유할수 있도록
비밀을 나누어 주신게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로 인해 수영시간도 넣고 오락프로그램도 넣었다가
정작 그날밤에 모두다 꾸벅꾸벅 조는 그런 수련회를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일까
올해도 그렇게 짜여진 프로그램 마지막 집회를 부탁받은 나는
지레 겁부터 먹는다^^ 

■ 나의 신앙으로 믿는 예수님
 
 글쓴이: J.B.Oh(mt13@hosanna.net)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제 어머님에 대한 추억이 간절합니다. 사실, 아직도 제 신앙에 대한 점수를 제대로 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오늘 날의 신앙을 갖기까지 제 어머님의 역할이 아주 컸습니다. 지금도 가끔 "어머님의 기도에 기생해서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머님의 강한 신앙 훈련 밑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겨울 때였습니다. 하루는 학생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부모님께서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계실지라도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으면 소용 없다"시는 강사님의 말씀이 제 안에 강하게 작용한 후부터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나의 신앙으로 믿어야 하는 분이십니다. 물론, 그 분 앞으로 나오기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나의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소개된 사마리아인들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친히 듣고■ 앎이니라."

어떤 할머님께서 며느리의 기도를 듣고는 "내 며느리의 하나님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시작하셨다는데 혹시 아직까지 "내 어머니의 예수님"을 믿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친히 듣고 그 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을 아십시오. 오늘 나의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으시는 기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 난 이제 온전히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내 모든 달란트를 주님의 뜻에 따르며 쓰겠다고, 그렇게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1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 스스로도 또한
"그래!! 난 주님을 위해 일을 하는거야." 하며 위로 하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불편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난 주님을 위하여 일 한다고 했는데, 왜 내 마음은 편하지 않은걸까..?
정말 솔직하게 마음을 뒤집어 놓고 생각 해봤습니다.
(모 마음이 뒤집혀지는건 아니지만..■)
난 전능하신 하나님을 빽으로 두고 성공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이 말하는 "성공" 이라는 단어에 가깝게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난 주님을 내빽으로 끌고 다녔던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스럽던지...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주님 앞에서 눈가리고 아옹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으니 창피스러울 밖에요.

정말 심각하게 기도해봐야 합니다.
나는 내 성공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끌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주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이 나에게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 건강 전도지의 사례담...이런 엄청난 효과가...

<건강 전도지를 잘 받아 가게 하는 법>
**전부 사례담에 의해 적은 것입니다.**
1.건강 전도지를 줄 때 "건강 하세요~"라고 하면서 주세요.
2.예수 믿으라는 복음과 교회 안내는 뒷면에 다 있습니다.
3.초신자 전도 보내기에 아주 좋습니다.
4.부끄럼 없이 신나게 막 나눠 주며 자부심도 가지더군요.
5.먼저 그림을 상대의 2~3보 앞에서 보이도록 하세요.
6.건강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다 받아 갑니다.
7.지나쳐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받아 갑니다.
8.다른 교회 다니시는 분을 만나시게 되면 여러 장을 주세요.
9.한 사람이 여러 장을 가져 갑니다. 나눠 줄려고 말입니다.
10.전도지에 관심을 보이시면 이웃에 나눠 주라고 여러 장 주세요.
11.아파트 전도 나가면 정말 요긴하게 쓰입니다. 띵~동! * *교회에서
왔습니다. 이러면 찬 밥 신세고 문 안 열어 줍니다.
12.띵~동!, -안에서:누구세요?- 하면 밖에서 말 할 필요 없습니다.
13.그냥 건강 전도지의 손,발,귀,5장6부의 그림을 비디오 폰에
갖다 대며 비춰 주세요. 문 다 열어 줍디다.■■
14.사람이 부재중이면 건강 전도지를 꽂아 놓고 와도 다 챙겨 갑니다.
자신의 건강이 소중 하다는 것을 알긴 아나 보죠.
15.따로 전도팀이 구성되어서 전도 한다???
16.아닙니다. 건강 전도지는 전 교인이 다 가지고 있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 줄 수 있습니다. 대단히 잘 나눠 주더군요.
자신도 전도에 동참(?)한다는 뿌듯함(?)도 가지더군요.
전 교인이 전도지를 잘 활용 할 수 있습니다.
17.차에 꽂아 놓아도 잘 가져 갑니다.
등등... 다음에 또 색다른 사례담이 있을 때 올리겠습니다.*^^*
승리하시고 다들 건강 하시길.....
"영육건강" 전도사 노 기쁨 011-9504-6997

주님...이 건강 전도지가 계기가 되어 많은 분들이
우리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게 하옵 소서!!!
인체 제2의 심장인 발의 지압,
5장6부 신경의 집합소인 손의 지압,
인체의 축소판인 귀의 지압,
건강의 뿌리인 오장 육부의 지압 등등...
4가지 그림을 각각 칼라 그림과 함께
누구든지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하였고 어디를 지압 하게 되면
어떻게 건강이 좋아 진다는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한 눈에
확 들어오게 제작 하였습니다. 초보자가 봐도 잘 압니다.
직접 나눠 주시면 무척 좋아하고 차에 꽂아 놓으셔도 잘 챙겨 갑니다.
명함 싸이즈로 지갑에 소지하면서 수시로 꺼내 들 보시더군요.
교회를 알리고 전도도 하는데 효과 만점으로 만들었습니다.
메일로 우편주소를 주시면 실제 샘플을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전도지로써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초신자가 전도하는데도 유용 합니다.
전 교인이 전도에 동참 할 수 있습니다. 전도지 한 장에 한 영혼 입니다.
*건강전도지 기획.제작 한국영육치유건강선교회(합동)
*우편주소를 메일 또는 전화로 주시면 실제 샘플을 곧 발송 해 드립니다.
직통:011-9504-6997, 051-529-2955(Fax겸용)
E-mail: gogo1255@hanmail.net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정의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가장 고상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참된 영적 상태을 시험하는 최종적인 시금석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는 교제야 말로..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모든 것들중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

기도는 가장 쉬워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가장 하찮게 취급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배울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찾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지 않는 현상과 기도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죄때문입니다.

자만하고 자족하는 자는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느끼는 자는 기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기도를 모르는 자입니다.

염려와 걱정하는 시간은 낭비일뿐입니다.
기도만이 생산하는 일입니다.
기도하고 싶지 않을때 당신의 영적인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일수 있습니다.

이세상에서 기도가 필요없는, 유일한 사람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