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금요일 오전, 오빠로부터 걸려온 전화.
상황이 상황인지라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많이 안 좋아지셨어. 일단 주말이 고비라고 하니 그렇게 알고 기다려.
주말이라니 기껏해야 2,3일.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아버지와의 이별이 정말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아버지가 암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 살지 못하실 거라는 생각으로 지내왔던 시간이 1년 반.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나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내가 집을 비울 동안 시부모님이 드실 반찬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지장 받을 일이 없도록 이런저런 주변 상황을 조정해 두었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아무리 서럽고 엄청난 사건이라 해도 살아남은 이들의 구차한 일상은 다시 계속되어야하기에 머리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죄송해요. 아버지.)
만사를 뒤로 하고 아버지 계신 병원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 도리이겠지만 전날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뵙기도 했고 또 아직은 급하게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형제들의 말에 따라 금요일 밤은 집에서 눈을 붙였다.
토요일 아침 7시 55분.
남동생의 전화다.
토요일 오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그것을 마친 후 바로 아버지께 가려고 했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바로 병원으로 와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젠 진짜 임박했구나.
설거지를 하다말고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길이 막힐 시간이라 지하철이 훨씬 빠를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남편이 남아서 나 대신 뒷수습을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나 혼자 먼저 집을 나선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쿵쾅거리는 마음은 벌써 저만치 먼저 뛰어 가고 있었다.
여동생도 남동생도 그런 내 맘을 배려해서인지 너무 서두르진 않아도 될 거라는 문자를 각기 보내 주었다.
성모병원에 도착했을 때가 9시 반 정도였다.
아버지는 임종 전 환자를 모시는 방에 계셨다.
이미 초점을 잃고 사지를 향하고 있는 듯한 아버지의 맥없이 열린 동공.
나를 반겨주시던 그 눈빛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를 향해 다가가서 아버지 귀에 대고 외쳤다.
-아버지, 저 왔어요. 사랑해요. 아버지. 정말 고마웠어요. 아버지.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귀에 기적처럼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가슴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사력을 다한 대답.
-어어어
아버지 가슴에 닿아 있던 내 귀에 분명하게 들려온 대답이었다.
같은 때, 아버지 발을 주물러 드리고 있던 오빠가 내게 아버지가 대답을 하셨다는 말을 했다.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던 아버지의 두 발에 힘이 꽉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내게 답해주시려고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온몸으로 쏟아내신 아버지.
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지 마라 하시는 말씀이었기에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슴 아팠던 나였다.
돌아가시기 2주 전쯤 마른 삭정이처럼 앙상한 모습의 아버지께 달리 드릴 말씀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드렸던 말씀이 아버지, 어떻게든 힘 좀 내세요, 였었다.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신경 쓰지 마라 하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나는 상처받고 우울해졌다. 절로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내가 평소 잘못하던 딸이어서 더 슬펐을 것이다.
나중에 가족들로부터 그즈음의 아버지가 심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몹시 힘들어하시며 잠시 마음을 열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서럽게 흘렸던 눈물은 결코 나를 향한 눈물이 아니었으니까.
더 이상 나로부터 어떤 힘도 얻지 못하는 아버지가 기막히고 아파서 흘렸던 눈물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소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와의 마지막 소통이 그렇게 가슴 아픈 것이 되고 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은 나를 몹시도 비통하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맘을 헤아려 주신 듯 내 사랑고백에 그토록 생생한 대답을 해 주셨던 것이다.
저 명치 어디쯤엔가 묵직하게 걸려 있던 바위 같은 안타까움이 녹아내렸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잠시 후, 간호사가 들어와서 아버지 상태를 보더니 잠깐이라도 가족들이 자리를 비우지 말라고 했다.
엄마와 우리 4남매, 그리고 제부까지 여섯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각자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절절한 인사를 나누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가장 듣기 좋아하셨다던 이야기도 해 드렸다. 외국여행 가셨을 때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 찍어주는 모델이 아버지를 향해 최고 미남이라고 추켜 세워주었다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아버지가 즐거워 하셨다고 한다.
눈물 속에서도 잠시 우리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아버지는 보셨을까. 왠지 보시고 좋아 하셨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웃으며 떠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렇게 모두의 인사가 끝나자 봉사자들이 임종 전 기도를 해 드리려 들어 왔다.
기도와 성가가 끝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외로워마세요. 아버지.)
중간에 두 번 잠시 숨이 끊어지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는데 한번 끊어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아버지께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원망을 부렸다.
-놀랬잖아요. 아버지. 저 깜짝 놀랬잖아요.
아기처럼 투정부리는 여동생이 아버지는 고통 중에도 얼마나 사랑스러우셨을까.
그리고 잠깐, 어느 한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이시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평화로운 임종을 맞으셨다.
6월 11일,11시 17분. 아버지의 숨이 멈춘 시각.
나중에 의사가 들어와서 심전도로 확인한 임종시간은 11시 30분.
한 평생 오로지 가족 사랑으로 일생을 다 보내신 우리들의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셨다.
얼마 후 수녀님이 들어오셔서 고마운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
-이렇게 고운 모습으로 가셨군요. 부활시기 중 돌아가시면 천국 문이 활짝 열린답니다. 분명 좋은 곳에 가셨을 거예요.
얼마 후, 남편이 병실로 들어섰다.
남편과 아버지 사이에도 참으로 많은 사연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사위를 마음으로 다 품어주셨다는 것이다.
남편이 그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드려왔던 기도가 있었는데 그 기도가 끝나는 시간, 내게로부터 아버지 임종소식이 왔다고 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몸에 우리는 마지막 입맞춤을 해 드렸다.
사실 아버지는 전날 밤 이미 임종을 맞는 방으로 옮겨지셨다고 한다. 남동생과 엄마가 곁을 계속 지키면서 조금이라고 불안한 상황이 되면 우리들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날 밤 잠을 잘 수 있도록 아버지는 기다려주셨고 다음날 아침 모두가 임종을 지켜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던 것이다.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열사흘동안 아버지는 봉사자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행복해 하셨다고 한다.
모든 분들이 아버지처럼 얌전한 환자는 없었다면서 엄마를 부러워했다고도 한다.
아버지가 다른 분들보다 얌전했다면 그것이 본래의 성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못 참아낼 만큼의 고통은 아니었을 거라는 의미도 되기에 가족들은 그로 인한 큰 위로도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병하시는 동안 엄마의 지극한 돌봄을 받으셨기에 행복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죽하면 아버지 배변 상태에 대해 예쁜 변이라고 적어 놓으셨을까.
아버지, 먼저 가서 계세요.
착하게 살다가 아버지 뵈러 갈게요.
그리워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망 같은 거 저희들 누구에게도 없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뒤 찾아오신 아버지 친구 분들의 뜨거운 눈물에서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느낍니다.
다음에도 전 아버지 딸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6월 13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선산 큰아버지 산소 옆에 묻히셨다. (이 날은 안토니오의 축일이었다. 아버지는 이 안토니오시다.)
화장을 해서 자식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어떻겠냐는 엄마의 의견에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셨다고 한다.
아버지 성품으로 보아서는 엄마의 의견이면 거의 무조건 다 따르셨는데 그래도 아버지 묻힐 곳은 고향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사촌들이랑 그렇게라도 돈독하게 지냈으면 하는 욕심도 가지셨을 것이고.
아버지가 묻히신 곳은 내가 꿈에서 종종 보았던 내 어릴 적 놀던 시골 산길 옆이었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시골 산을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 손을 잡고서야 마침내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