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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뽀뽀


BY 선물 2011-05-30

마른 삭정이처럼 쪼그라든 내 아버지의 작은 몸피.

초점을 잃은 채 흐릿하게 허공만 훑는 옅은 눈동자.

사랑하는 내 아버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내려놓으신 당신 앞에서 나는 감히 입을 뗄 수가 없다.

그 어떤 말도 생의 마지막을 눈앞에 둔 아버지의 먹먹한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리라.

알면서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얼마 전 당신을 꼭 껴안으며 <사랑해요, 아버지> 라고 했을 때 온 힘을 다해 <나도>라고 답하셨던 아버지.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너무 다르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기운이 따뜻하지가 않다. 가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사랑합니다, 전하고 싶은데 이 묘한 기운 속에서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린 가슴 혼자 종종거리다 겨우 한 말씀 드렸다.

<아버지, 뭐라도 더 잡숫고 조금이라도 더 기운 내셔요.>

기운 내시란 말이 얼마나 부질없게 들리셨을까 짐작되면서도 내 입은 그렇게 열렸다.

<신경 쓰지 마라.>

온종일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면하시던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사랑한다는 내 말에 나도, 라고 하셨을 때보다 백번은 더 힘들여 겨우 끄집어 낸 목소리로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거부.

아버지가 나를 거부하셨다.

나는 기가 막히다.

머리까지 하얘지는 느낌.

주르륵 흐르는 내 눈물.

이 눈물을 아버지께 들킬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 거부당한 느낌, 그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는 것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처절한 아버지의 마음이 밟혀서이다.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서러운 것이다.

내 마음은 잠시 주춤거렸지만 몸은 반대로 아버지를 향했다.

그러면서 드린 말씀이 기가 막히다.

<예, 아버지, 신경 쓰지 않을게요.>

신경 쓰지 마라는 그 서늘한 말씀의 파장이 커서였을까, 나는 그만 실언하고 말았다.

정말 뜻밖의 엉뚱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뺨에 내 뺨을 갖다 댔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에도 고통을 느끼시는 아버지.

<떨어져!>

아버지는 또 한 번 온 힘을 다해 떨리는 음성을 내뱉으셨다.

나는 민망하고 죄스럽고 슬픈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는 심장의 떨림을 견딜 수가 없어서 튕기듯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아버지께 다가앉아 손과 발을 만져드렸다.

어떤 형태로든 한번이라도 더 아버지께 내 사랑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4월의 어느 하루.

여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일산으로 왔었다.

바람이나 쐬게 해드리려고 길을 나선 김에 내 얼굴이나 보여 드린다며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것이다.

겨우 부축을 해서 움직이시긴 했지만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온몸으로 다 표현해 주셨다.

그날은 함께 식사만 겨우 했을 만큼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겐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를 안아 드리려 다가선 내 뺨에 아버지가 먼저 뽀뽀를 해 주신 것이다.

사실 우리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아드리고 뽀뽀해 드리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만큼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또한 특별한 의미를 둘 만큼 별스런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날 아버지의 뽀뽀는 너무도 따뜻했고 정말 사랑받고 있음을 듬뿍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통증이 다시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병원으로부터 검사를 받은 아버지는 더 이상의 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연명할 수 있는 모든 치료는 끝났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리 될 줄 알았지만 마음의 준비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던지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는다.

병원에 가서 아버지를 뵙던 날.

사촌언니들도 아버지를 뵈러 대구에서 올라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어드는 목소리일망정 아버지는 당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언니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기도를 청하였다.

아버지는 기도가 끝날 때마다 성호를 그으시더니 급기야는 주먹을 쥐며 파이팅, 이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치료가 다 끝났음을 모르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파이팅은 미약하나마 당신의 희망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아버지는 완화병동으로 들어가시면서 의료진으로부터 당신의 상태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었다.

그날 동생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

당신 상태를 다 듣고 난 다음 아버지가 바로 하셨던 말씀은 끝! 이라는 것이었다고.

전날의 파이팅이 끝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그동안 너무나 큰 수고를 했다며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아마도 그 때 아버지는 마음으로부터 이 세상을 내려 놓으셨던 것 같다.

완화병동으로 옮기신 뒤부터는 아버지가 통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하루하루가 달라지시는 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귀여워하시던 다섯 살짜리 손자가 와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셨다.

그리고 계속되는 아버지의 침묵.

물론 아버지가 체력적으로 말씀하실 기운조차 바닥나 있음을 잘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당신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려는 외로운 몸부림을 치시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아버지는 다 듣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산처럼 듬직하고 아늑한 울타리가 되어 가족을 지켜 주신 그 큰 사랑이 이제 우리를 먼저 보내려는 것이다.

지금 나는 참으로 간절하다.

그날 따스한 기운이 담긴 아버지의 뽀뽀가.

그날 내 사랑의 표현에 온 힘을 다해 나도, 라고 답하셨던 그 음성이 너무도 간절하게 듣고 싶고 간절하게 느끼고 싶다.

아버지. 가시기 전에 우리 사랑을 다 담아가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내가 당신의 딸인 게 정말 행복했음을 전하고 싶어요.

아무리 거부하셔도 아버지의 마음 전 다 알아요.

사랑해요. 내 아버지. 내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