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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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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스케


BY 선물 2010-10-25

1.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눈길이 잡힌 화면.

뭔가 수선스런 분위기 속에 낯선 얼굴들이 노래를 부른다.

손톱이 엄청나게 긴 무속인도 있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앳띤 소년도 있다.

이름난 가수들이 그들의 노래를 듣고 합격, 불합격을 그 자리에서 결정해준다.

보다 말고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린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모처럼 빈둥거리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릴 기회가 생겼던 거다.

 

이리 저리 돌리는 채널 중 달리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러다가 아까 그 화면이 다시 잡혔다.

시간 죽이기로 채널을 고정했다.

그런데 은근 볼만하다.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여자아이의 음색이 신선하다.

왕따였던 자신을 일으킨 것이 음악이라고 말한다.

자작곡이란 노래도 귀에 즐겁게 들린다.

심사를 맡은 가수들도 그 아이의 노래를 칭찬하고 합격을 말한다.

그러다가 프로그램이 끝났다.

앞으로도 계속 되는 것 같은데 언제 하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부러 찾아서 볼 만큼 여유롭지 못한 까닭이다.

 

방학이 되어 집에 온 딸아이가 늦은 밤 텔레비전 앞에서 눈을 말똥거리고 있다.

지난 번 내가 보던 그 프로그램이다.

옆에 앉아서 함께 보니 지난번보다 더 재미있다.

그것이 슈스케(슈퍼스타 케이)이다.

 

어머님이 퇴원하셨다.

더 이상 한가하게 앉아 텔레비전 보기가 민망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금요일 밤 11시.

텔레비전 앞에 앉은 딸아이 핑계 삼아 슬그머니 함께 앉았다.

방학이 끝나고 딸아이가 갔다.

가기 전에 한번 할머니 옆에서 슈스케를 함께 보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 드리는 것 같았다.

어머님도 살짝 흥미가 생기신 듯 하다. 다행이다.

그 뒤로 어머님 방에서 효도 하는 척 하며 함께 슈스케를 시청했다.

물론 어머님 주무시고 나 혼자 눈 말똥거리고 볼 때가 더 많았다.

내가 이렇게 눈치를 보며 텔레비전을 시청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 때문이다.

남편의 눈에 이런 프로는 참 유치한, 쓸데없는 프로그램이다.

그렇다고 보지 마라 강제하진 않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괜히 부딪힐 맘이 없어 차라리 안 보고 속 편한 쪽을 택할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번엔 잔머리 써 가면서 끝까지 다 보았다. 그만큼 흡인력이 강했다.

 

아쉽게도 남편까지 끌어들이진 못했다.

함께 보았으면 분명 더 재미있게 보았을 것이다.

내가 슈스케를 보는동안 남편은 동물농장을 보았다.

 

2.

 

슈스케에 잘 생긴 청년이 있다.

노래 잘하는 청년들도 있다.

귀여운 여학생들도 있다.

톱 일레븐이다.

 

예선에서 보았던 이는 장 재인 뿐이다.

기타 치며 자작곡을 불렀던 왕따소녀 장 재인.

그녀의 님과 함께를 들으며 감탄했다.

포동통 귀여운 소녀 박보람의 세월이 가면을 들으면서 우와 귀가 번쩍 뜨였다.

장 재인과 함께 신데렐라를 환상적으로 불렀던 김 지수 역시 언제나 대단했다.

쌍둥이 형제 허각. 그는 자신을 주인공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이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노래를 부를 때 만큼은 그가 언제나 주인공 같았다.

그리고 늘 자신만만 부산의 미소년 강승윤.

내 아들보다 더 어린 그가 귀엽고 대견했다.

 

그렇게 즐기면서 텔레비전 앞에 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다.

박보람이 떨어지던 날,

김 지수가 떨어지던 날,

장 재인이 떨어지던 날.

그렇다고 다른 이가 떨어지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력있는 이들이 이렇게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잔인하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허각과 존박이 남았다.

내가 누구 편인지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 편인지 알게 되었다.

허 각이 노래를 정말 잘 부르는구나. 이러면서 긴장.

존 박은 노래 선곡을 좀 더 잘했더라면. 이러면서 착잡.

그래서 내가 존박 편임을 알았다.

 

허각이 우승했다.

고생 많이 하고 감격적인 순간을 맞은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내 눈은 존박에게로 자꾸 향했다.

보기 드물게 맑고 깨끗한 눈동자.

선한 웃음.

나는 끝까지 남는 자가 존박이기를 바랐지만 허각이 남은 것에 어떤 불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작년 시청자들로만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강 승윤이 우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해는 나 같은 아줌마들도 자녀들을 따라 슬그머니 열혈 시청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만약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우승은 존박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엔 일을 냈다.

일간지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슈스케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런 프로그램에 문외한이었던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직접 참여하게까지 만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허각 우승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알았다.

존박에게 2등은 축복이 되리란 것을.

1등이 된 존박에겐 잠시 환호하고 축하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잔잔한 감동이나 여운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걱정했을 것이다. 혹시 거만해지지 않을지, 한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 그런 걱정들.

 

그리고 노래실력으로만 본다면 허각이 더 나았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존박은 허각에게 졌어야 한다.

그래야 이 승부가 아름다울 수 있고 존박도 박수 받을 수 있다.

 

그 사실을 모든 승부가 끝난 지금 알았다.

존박은 웃음으로 아름다운 2등이 되었고 허각은 눈물로 아름다운 1등이 되었다.

웃음과 눈물 모두의 승리.

 

슈스케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들의 앞날을 지켜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그들에겐 이제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