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첫날, 드디어 남의 손으로 지은 밥을 앉아서 편하게 받아먹었다. 워낙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병원 밥도 달기만 하다. 가끔 병문안 가서 면회할 때 환자들이 먹는 밥에 침이 꼴깍 넘어가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 밥은 싫다는데 난 비위도 좋은가, 그 밥도 탐이 날 때가 있었다. 한 끼 밥을 그렇게 먹고 나니 바로 금식이란다. 에고, 난 밥 안 먹곤 못사는데······.
어릴 때의 일이다.
학교에 등교한 나는 이상하게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열도 없고 별다른 특별한 증세는 없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어질어질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큰 맘 먹고 조퇴를 했다. 어린 맘에도 우선은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던가. 집으로 오는 내내 비틀거리며 길게 늘어 선 주택의 담벼락을 의지하여 간신히 집으로 돌아 왔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본 엄마는 깜짝 놀라며 우선 병원에 가자고 하신다. 내가 그럴 힘이 도저히 없다며 털썩 주저앉자 엄마가 황급히 자리를 깔아 주셨다. 근데 이부자리에 누워있자니 뭔가 슬슬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하얀 밥이었다. 갑자기 그걸 먹으면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특별히 계란까지 부쳐서 상을 차려주시자 나는 단숨에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밥을 먹고 나니 아팠던 몸은 기적처럼 말끔히 나아 있었다. 아마도 그날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나보다. 그 때 얼마나 심각했으면 저학년이었을 때의 일인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의지하던 그 담벼락은 지금쯤 다 사라졌겠지.
여하튼 나는 그렇게도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울 어머님 말씀처럼 내가 젖배를 곯았나? 울 엄만 아니라 하시는데······.
지금도 가끔 다른 사람들과 외식할 일이 생기면 다들 내 눈치를 보며 국수집엔 가질 못한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워낙 밥 좋아하는 사람인줄 다 아는데 뭘 그러냐고 한다.
그런데 수술 후 금식을 하게 된 것이다.
하루를 꼬박 굶은 후 먹게 된 것이 처음에는 물 한잔. 그 다음에는 미음이었다. 그리고 내내 죽을 먹었는데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퇴원을 하루 앞둔 날 다른 문제로 퇴원이 미루어졌다. 어차피 통증이 심해 예상했던 날 퇴원할 형편은 아니었다. 의사의 지시도 있고 해서 하루 더 입원해 있게 되니 좀은 맘이 편해졌다. 밖은 올여름 최고의 무더위라며 푹푹 찌는 열기 속이라는데 나는 뜻밖의 피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이 생각보다는 훨씬 고역이었다. 뉴스에서는 이런 무더위에는 노약자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만큼은 집 생각을 안 하려 했지만 그런 뉴스까지 접한 내 맘은 결코 편할 수가 없었다. 밉든 곱든 우리 시어머님 이런 무더위에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부엌살림을 하시나 자꾸 걱정이 되었다. 만들어 놓은 반찬도 입원이 예상보다 길어진 관계로 벌써 동이 났을 텐데.
남의 밥 먹고 편히 누워 있는 입원도 좋지만 이젠 슬슬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상 생활로 빨리 돌아가야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몸 상태가 계속 좋지 못해 생각보다 나흘이나 더 입원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병원 생활도 조금씩 지쳐갔다.
입맛도 떨어지고 소화도 안 되고 정말 중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아, 사람이란 팔자란 것이 따로 있나보다. 내 팔자에 이런 호강은 되레 병을 만드는군.
5명이 입원한 병실에서 생명에 대한 걱정이 없는 환자는 유일하게 나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말기 암 환자로 병원에서도 포기한 분들이었다. 그들은 병원에 하루라도 더 머무르려고 했고 병원에서는 그들을 하루 빨리 퇴원 시키려 하면서 실랑이가 오가곤 했다.
내 옆에 계신 분은 칠순 가까운 할머니이신데 올해 초 자궁암 수술을 해서 잘 완치되었다고 했는데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재발해서 온몸으로 암세포가 번진 상태라고 했다. 이미 복수가 차오른 그 분은 20일 넘게 금식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간호사 몰래 자식들에게 부탁해서 복숭아를 조금 드셨는데 그날 바로 문제가 생겨 한바탕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분은 가장 드시고 싶은 것이 야채 겉절이 해서 비벼 놓은 밥이라고 하셨다. 못 먹는 고통. 그것은 참으로 가혹해 보였다. 아마 내가 퇴원한 다음 날 그 분은 쫓기다시피 하며 다른 병원으로 옮기셨을 것이다. 암 센타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주로 하는 곳이라서 그조차도 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더 이상 환자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내 앞에 계신 분은 아직 예순이 안 되신 분이다. 세련되게 생기신 분인데 그분도 재발로 온 몸에 암세포가 전이되어 이미 손도 쓸 수 없고 고통까지 심한 상태라고 했다. 한번에 진통제를 아홉 알씩 드시는데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때로 정신이 혼미해지신다. 주무시면서도 밥도 짓고 국도 퍼서 담는 손짓을 하며 꿈인 듯 생신 듯 살림을 하신다. 처음 보는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보고 뭐라 말시키는 줄 알고 깜짝 놀라는데 그것이 허공에 대고 눈감고 하는 행동이란 것을 알고는 실소를 하곤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갓 취업한 새내기 아주 예쁜 따님과 군에 간 아드님이 있는데 그렇게 심한 고통에 있다는 것이 정말 마음 아팠다. 이분은 진통제를 가득 받아서 나보다 하루 빨리 퇴원했는데 나중에 외래 진료차 병원에 갔다가 입원실에 들러보니 다른 분은 다 모르는 분들인데 그분만 다시 입원하셨는지 예전에 있던 그 침대 위에서 여전히 팔을 허공에 저으며 무슨 일인지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또 39살이라고 적혀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내가 본 사람 중 그렇게 종이 색과 똑같은 흰색 살을 가진 이는 처음이었다. 말라도말라도 그렇게 마를 수 있나 싶을 만큼 깡 마른 그녀는 말이 통 없었는데 그녀의 어머니 말씀으로는 불과 이십일 만에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평소 마르긴 했지만 감기 한번 앓았던 적이 없었는데 소변을 잘 못 봐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확실한 병명은 모른다. 그녀는 다른 병원으로 가서 우선 다른 치료부터 받고 다시 암 센타로 오라고 해서 내가 입원해 있는 중에 병원을 옮겼다. 소변을 보지 못하는 그녀는 배가 아주 볼록하니 나왔고 고통이 엄청나 보였다. 미혼이라는 그녀보다 종종걸음 치던 그녀의 어머니가 지금도 더 짠하게 마음을 적신다.
짧게 병원을 스쳐간 이들도 있는데 그녀들은 조기에 암을 발견했거나 나와 같은 경우였다.
내가 퇴원하기 하루 전 다른 병실에서 옮겨왔던 한 엄마도 사실은 나와 꼭 같은 경우로 수술했는데 그녀는 종양검사결과 악성으로 나왔다고 했다. 아직 2기이긴 하지만 워낙 희귀종이라서 약이 없어 치료가 힘들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그녀는 시골에 작은 집 한 채를 샀는데 남은 생이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동안이라도 편안한 맘으로 쉬고 싶다고 했다. 보험설계사로 앞만 보고 살아오며 살림을 일군 그녀는 정말 긍정적인 얼굴로 이젠 주님이 자기를 쉬게 하시려고 하는가 보다라고 이야기 했다. 이제 마흔 넷인 그녀의 허락된 삶이 좀 더 길기를 소망한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머물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죽음을 통보 받은 이들의 생활이 내가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는 훨씬 평화롭고 담담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죽음은 오는 법이다. 다만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각 개인의 생이란 정말 찰나와 같은 것. 거기에 연연하고 집착하지 말고 그저 허락된 시간에 충실하게 살다 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원을 하고 난 지금 괜히 몸 이곳저곳이 다 의심스럽고 병 같기만 하다. 사실 세상이 좀 더 우스워지고 좀 더 만만해지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삶이 덜 힘들 것 같다. 그러면서도 건강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하는 것을 보면 내 속에 있는 모순이 제법 심각한가 보다.
2006년 8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