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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2)


BY 선물 2008-10-23

효도라는 것이 부모님 맘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동생도 어릴 때 꽤 불효를 했던 것 같다.
그네에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고 교통사고 나서 실려가고 길 잃어버리고 자취를 감춰 하루종일 찾게 만들고.
그때 동생을 데리고 간 집에서 부모가 안 나타나면 그냥 입양하려 했다고 한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 똥구멍(치질)수술 받아요 라고만 했다던가.
동생은 당시 아주 어리기도 했지만 겁도 없이(또 이런 겁은 없어요) 집에서 어지간히 먼곳까지 놀러나갔었던 것 같다.
그런 사고를 제외하면 달리 부모님 속 썩혀 드린 일은 없었던 듯하다.

대학도 무난히 붙고 취직도 척척하고 대학1학년 때 만난 1살 연하 유순한 남자친구와 7년간 연애해서 결혼도 하고.
지금 제부는 국제변호사가 되어 있고 아들하나를 두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도 여간 영특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4남매는 부모님께 큰 자랑거리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장녀인 나는 착하다는 것이 자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자랑거리가 없을 때 주어지는 칭찬이란 것을.

오빠와 남동생은 언제나 부모님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뛰어난 수재였다.
최고 대학에 척척 합격해서 부모님 기를 살려드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만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으로 그런 류의 효도는 끝이었다.
물론 앞으로 남은 시간 중 다시 만회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한 집안이 잘되려면 맏이가 잘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어떤 기준으로 잘되고 못되고를 결정할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살다보니 경제적인 기준이 우선되는 것을 외면하기 어렵다.
그런 기준으로는 여동생이 제일 잘되어있다.
남동생도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지만 불안한 대로 제 앞가림은 하며 고맙게도 올케와 더불어 맏이의 역할도 제법 해낸다.
문제는 장남인 오빠다.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다.
옛날 가난한 선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평생 글쓰고 책읽으며 사니 가정경제는 올케가 힘들게 꾸려간다.
너무 많이 늦어지고 있으나 나는 기대를 접을 수가 없다.
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빛을 보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장남, 장녀가 사는 것이 힘들다보니 참 씁쓸할 때가 많다.
맏이들은 어느 정도 동생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부채처럼 짊어지고 있다.
그래서 집안 행사가 있거나 가족끼리 외식이라도 하게 될 때 동생들보다 먼저 척척 계산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오빠는 그럴 엄두도 못내고 나또한 그럴 여유가 없다보니 그런 자리가 바늘방석이다.

아마 동생들은 그런 맏이들의 맘을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초라한지, 얼마나 맘 아픈지...

항상 스스로의 못남을 속상해하던 내게도 사실 소망이 있었다.

시집가면 잘해 드려야지.
결혼과 상관없이 잘해 드릴 수 있을 텐데도 혼자선 자신이 없었던가 나는 이상하게 결혼하면 나중에 잘해드려야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자식이 못되는 것 같다.

처음엔 남편이 모든 것을 본가 위주로 생각해서 내 맘을 아프게 했고 마음이 바뀐 지금은 형편이 허락질 않아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다.
걱정 끼치지 않는 것을 효도라고 말한다면 조용히 살고 있는 요즘이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걸 효도라고 말하며 무마할 염치가 내겐  없다.

오빠와 남동생은 그래도 학창시절 누구도 하기 힘든 전교 1등들을 척척 해내는 것으로써 사실 큰 효도를 했으니 지금 처지가 달라졌다 해도 나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는 자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못난 딸이다.

여동생은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친정에 힘든 일이 생기면 온 마음, 온 몸으로 다 노력하는 아이이다.

작년 한해는 친정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그때문에 70을 목전에 둔 엄마는 몇달간 난데없는 수인생활을 치러야 했다.

아버지 혼자서 지내시는 몇달동안 여동생은 하고 있던 모든 일을 다 정리하고 오로지 아버지 수발, 어머니 면회에만 전념하며 단 하루도 그 일을 거르지 않았다.

물론 가까이 살고 있어서 가능하기도 했으나 그 지극정성이 보통 마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도 일주일에 한번씩 두 시간 거리를 반찬을 해서 다녀왔었다.

그렇게 온 식구가 한마음으로 노력한 시기였지만 그중에서도 여동생이 보여준 효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부모님은 정말 예쁘기 그지없는 효녀 하나는 확실히 둔 복있는 분이셨다.

 

생신이나 명절 때 친정에 가면 여동생이 살짝 나를 부른다.

가면 가방에서 예쁜 옷이나 백 같은 것을 선물로 준다.

늘상 언니에게 그렇게 한다. 내가 그렇게 동생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베품은 동생의 몫이 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언니가 자존심 상해하며 마음을 다칠까봐 하는 모양이 잘못한 사람처럼 조심스럽기만 하다.

 

욕심 많다고 혼내고, 싸우면 듣기 싫어할 만한 말만 골라 약올렸던 언니인데도 동생은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있다.

나한테 잘하지 않아도 지금 부모님께 하는 것 만으로도 넘치도록 고맙고 사랑스러운데 형제들에게도 잘하려고 애쓰는 맘이 얼마나 대견한지.

언니를 위해 형부한테 일부러 애교부리는 모습을 보면 쟤가 없었으면 어떡했을까 싶다.

 

그러면서도 불편한 마음은 숨기기 힘들다.

그래서 오빠를 보는 내 맘은 아픔으로 가득하다.

오빠의 처진 어깨, 낡은 구두, 아이들 혼낼 때 모습들을 보면 속상한 맘에 눈물이 난다.

조카들끼리 다투면 오빠는 오빠아이들을 혼내는데 아무리 잘못이 있어서 혼내는 것이라 해도 내 맘은 좋질 않다.

동생들은 나와는 다른 시선을 갖고 있음을 안다.

아무래도 오빠가 부모님을 너무 오래 힘들게 해 드린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여동생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

도우미 아줌마 한번 부르지 않고 아이들 영어과외 시키며 남편 유학비용으로 시부모님께서 쓰신 돈을 어느 정도 갚았다.

작년 친정 일로 그 일을 그만 두었지만 여전히 지역사회 일에 발벗고 나서서 봉사하고 있다.

과외할 때도 동네 분들께 죄송하다면서 복도나 계단을 보는 이가 없는 데도  쓸고 했던 아이다.

 

나는 동생에게 말하고 싶다.

진짜 진짜 고맙다고.

그러나 못난 언니는 그 말조차 쑥스럽고 면목없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