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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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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향하여


BY 선물 2008-03-27

봄이 오는가보다. 창으로 쏟아지는 때깔 고운 빛은 천생 봄의 것이다.

작년 이맘때도 이렇게 봄은 왔겠지. 나는 또 그렇게 봄을 맞았겠지.

그저 오나 보다, 가나 보다 그렇게 데면데면했을 테지.

마흔이 불혹이라는데 난 훨씬 일찍부터 몸과 맘에 굳은살이 박였다.

굳은살은 나이도 잊게 했다. 내 나이를 모른다는 게 기막힐 노릇이지만 그것이 내겐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올해는 아예 잊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외웠다.

마흔 넷. 외우기도 쉽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이를 말하는 자리가 생기면 자꾸 자신 없어진다.

마흔 넷쯤 되었어요.

그렇게 조심조심 말한다.

그만큼 나이라는 것에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러면서 내 뒤로 봄이, 여름이, 가을이 그리고 내가 태어난 겨울이 아무런 감동 없이 휙휙 지나갔다. 그 사이 꽃은 피고지고 태양이 이글거리며 낙엽은 떨어지고 눈은 쌓이고 자연은 그렇게 철따라 묵묵히 제 생명의 몫을 해내느라 꽤나 분주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었을 때가 있었다.

무턱대고 세상이 만만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참 행복하게 살 얼굴이라 했다.

걱정 근심 같은 어두운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것을 믿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이상하리만큼 존재치 않았다.

미래는 내가 그리는 대로 그려질 줄 알았다.

스스로 잘난 줄 알고 모든 일을 내 소신껏 결정했다.

그러나 대가는 혹독했다.

진짜 잘난 사람은 크게 실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잘난 줄 아는 사람은 제 꾀에 넘어가 자기 발등을 찍기가 쉽다.

나도 그렇게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씩 저지르게 되었다.

인생에서 실수란 작은 것 같아도 엄청난 결과를 불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애써 추슬러가며 일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한 두 번의 경험으로 완전한 변신을 꾀하기에는 어리석음의 정도가 심했나 보다.

자꾸만 다치게 되고 고통 받게 된다.

내가 배운 대로 내가 아는 대로 행한 것에 대해 뜻밖의 아픈 결과가 나오는 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인과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억울한 고통도 복병처럼 나타나 나를 골탕 먹였다.

드디어 나는 두려움을 배웠다.

세상에 있는 행, 불행은 누구의 몫으로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큰소리치며 자신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젠 남의 슬픔을 보며 한발 물러난 동정을 느끼는 일은 없다.

동정은 내 몫이 아닌 일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우월적 감상이다.

대신 동병상련의 절절한 연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는 이들을 바라보는 내 맘은 열려있고 따뜻하다.

그들이 울 때 그들의 슬픔에 고스란히 몰입된다. 그래서 같이 울 수밖에 없다.

어떤 일에 대해 남의 일이라고 단정 짓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교만인지를 나는 직접 겪으며 배웠다.

그러느라 세상의 유혹을 느낄 겨를도 없었고 나이를 새길 여력도 없었다.

오십은 지천명의 나이라는데 그땐 또 지금의 내가 깨우치지 못한 하늘의 뜻을 겸허하게 배우고 있을 테지.

내 고개는 세상을 향해 훨씬 더 깊이 숙여져 있을 것이고.

겸손의 마음을 갖지 못한 이에게 삶은 훨씬 모질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을 견뎌내는 힘 또한 한없이 미약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고개 숙이지 않으랴.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면서 삶이 정말 두렵게 느껴진다.

아무 것도 모르고 영원히 교만할 수 있는 삶이 있다면 어떨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택하게 될까.

영원히 철들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소망한 적도 잠시 있었다.

하지만, 그 삶은 진실이 아닌 것 같았다.

허망할 것 같았다.

고통을 겪으며 극복하고 삶에 감사할 줄 아는 삶.

내 고단한 삶을 그런 과정에로 가는 수업료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나보다 더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밝게 사는 이들을 생각하고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욕심 없이 받아들여야한다며 반성하기도 했다.

하루가 다 저물어가는 시각.

그래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기도 중에도 난 어느새 이런저런 걱정과 불안으로 평화를 잃은 나를 본다.

그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진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불안을, 아픔을 이성으로 잠시 조절할 수는 있었으나 아직은 수양이 부족한지 내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배우고 깨우쳐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가보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어둑어둑해지고 가라앉는 나를 보게 되는 것은 슬프다.

새소리에 귀가 쫑긋하고 꽃향기에 코가 방실 웃고 시시각각 옷 갈아입는 자연에 부셔하는 눈을 갖고 싶다.

미리 마음이 노쇠해가는 것은 분명 서글픈 일이다.

나, 한없이 못난 것 알고 어리석은 것 알며 세상 두려움 갖고 이렇게 납작 엎드려 있으니 이젠 환한 빛을 향한 희망을 믿을 힘도 갖고 싶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 나를 보며 행복의 환한 빛을 느끼게 하고 싶다.

슬픔에 지친 서로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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