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당주보에서 한 신부님의 글을 보았다. 그 분은 사제 서품을 받고 난 뒤 처음 발령 받은 성당에서 교우들과 제법 깊은 정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본당으로 떠나게 될 때 헤어짐이 너무 아파 꽤나 큰 상처를 받으신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깨달았던 것이 신자들에게 너무 많은 정을 주지 않는 것이 상처도 덜 받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정이 들 때는 몰랐으나 막상 이별의 시간이 되고 보니 멋모르고 들였던 곰삭은 정으로 인해 신부님의 가슴이 한참동안 먹먹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헤어짐에 아팠던 그만큼 정들임에도 겁을 내게 되었고 그 뒤로는 다가서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게 되었다고 하셨다. 차라리 처음부터 깊은 정을 몰랐던 분이었다면 사제의 길을 한결 수월하게 걸어가실 수 있었으련만... 아마도 이별의 준비를 제대로 할 여유도 없이 새로운 임지로 떠나야 했던 신부님의 길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 했으리라.
이렇듯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고 다시 헤어짐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 같다. 이별마다 늘 아픔을 겪어야 한다면 가슴은 언제나 시린 멍으로 시퍼렇게 물들여질 것이다. 아픔으로 해지고 닳아 조각조각 너덜거리는 한 자락 초라한 미련의 누더기를 짐처럼 껴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인연의 바다에서 자기 방어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선을 긋고 거리를 둘 줄도 알게 되고 등돌리면 적당히 남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다지 어렵잖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 그렇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정을 들이고 그 이상의 것은 감정의 낭비라 생각하며 스스로 제어할 줄 아는 지혜를 체득한 이들을 볼 때 나는 참으로 기특하고 또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신통력이 없는 안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좀은 촌스럽고 깔끔하지 못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자기 절제에 서투르고 감정 조절에 약한 사람들. 소위 `쿨'한 사람들이 환영받는 요즘 세상에서 자칫 왕따가 될 소지가 많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꾸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학창시절, 몇 번의 전학을 경험했던 나는 그 때마다 친구들과의 이별에서 과할 정도의 슬픔을 쏟아내곤 했었다. 정들었던 친구들의 좋은 웃음과 만만했던 관계들이 그대로 영영 끝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로 아쉬움을 배설했었다. 오래도록 못 보면 허전함에 견딜 수 없으리라 생각할 만큼 깊이 길들여졌던 우리는 그러나 세월 따라 서로를 차차 잊어갔다. 간간이 주고받던 편지들도 어느 순간부턴가 부담스런 의무감에서 무거운 짐으로 생각되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그조차도 뚝하고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배우게 된 것이다. 너 없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그런 간절함도 결국 변하게 되고 너 없이도 그렇게 그렇게 세상은 또 살아지더라는 자각. 그것은 쓸쓸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차라리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아픔 따위는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리고 어떻게든 우리의 걸음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고 그 걸음은 또 다른 새로운 인연들을 끊임없이 몰고 와서 빈자리를 메우는 듯 느껴졌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내 경우 지난 인연들을 지켜나가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주 만날 수도 없고 또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거리만큼 어느 새 마음도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전화를 해도 서로 나눌만한 대화가 점점 없어졌고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자꾸 빈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꾸만 추워지고 혼자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연들을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생의 끝까지 끌어안고 갈 수는 없을 터, 때로는 가지치기도 더러 해 가면서 그나마 안고 갈 인연에 대해 더 많은 정성을 쏟는 편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스스로 변명해본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따지는 마음을 갖고 보니 그 동안의 인연들이 한결같이 시들해지며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어떤 의미에서든 나를 충만하게 해 줄 인연을 밝게 가려내는 혜안(慧眼)을 갖지 못한 내가 무슨 잣대로 가지치기를 할 수 있단 말인지 자괴감마저 드는 것이다. 그동안 오래 익은 장맛 같다고 스스로를 생각해오던 내가 어느 결에 이렇게 깍쟁이처럼 찬바람 홀로 이고 앉아 살아가게 된 것일까? 자꾸만 자신이 빈 껍데기 같아 보인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설령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없는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부질없다 하기는 어려운 일이리라. 짧은 만남에서도 얼마든지 내 평생을 데워 줄 식지 않는 온기를 선물한 인연들은 얼마든지 존재했고 세월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내 맘속에서 불 지피고 있는 소중한 인연이 적지 않음을 잠깐씩 망각했던 것이다. 만날 수 없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하여 그것으로 인연의 끝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련만...
가끔 세계지도를 보며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또 서울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될 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 동네로까지 좁혀지고 결국은 우리 집을 거쳐 나라는 존재의 크기까지 찾게 되는 것이다. 아마 눈에 보이는 점으로도 우린 나타내어지지 않을 것이란 말을 하면서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작고도 작은 점 하나조차 되지 않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함께 만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인연의 힘일지 새롭게 느껴보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때로는 공간의 개념을 초월해서 시간의 개념 속에서 만나게 된 인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가끔 전철을 타고 가다 떠올리는 생각이 있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작스런 정겨움을 느낄 때가 생기는 것이다. 저 자리를 스쳐갔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스쳐 갔을 많고 많은 사람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너와 나는 억겁의 시간들 속에 이렇게 한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상대가 낯설지 않고 또 예사롭게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스쳐 갔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흔적조차 때로는 정이 드는데 하물며 그 시간과 공간의 한 점에서 만나 함께 한 오묘한 인연들의 소중함을 왜 자꾸 부담스러워 하는 건지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진다. 어쩜 나는 그 인연들이 부담스러웠다기보다 그만큼의 정성을 쏟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어 도망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는 끈적거리는 정에 초연하지 못하고 헤어짐에 눈물 뚝뚝 떨구는 깔끔하지 못한 사람이 몹시 그립다. 만나보고 싶다. 어릴 때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더러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 이별의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아직 아니고 싶다. 아직은 헤어짐에 상처받아도 좋은 사람이고 싶다. 좀 아프다 하더라도 두려워 몸 사리지 않고 그렇게 깊은 정 들이는 인연을 갖고 싶다. 그런 인연을 탐한다는 것, 그것은 어쩜 이미 내가 그런 정서로부터 너무 먼 길을 떠나 온 까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아, 이런 아득함이라니... 그러나 너무 늦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뒤돌아보고 혹시라도 나를 껴안고 가려는 인연에게조차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일이다. 혼자라는 것, 그것이 무슨 매력 있단 말인가? 어차피 언젠가는 혼자서 먼 길을 떠나게 될 터, 그 때까지는 인연의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