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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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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게임


BY 선물 2004-03-22

진실게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연한 자극에도 감성의 바다가 살랑거리며 춤을 추고 스치는 눈빛에도 야릇한 설레임이 느껴지던 시절, 나는 은근히 그 비밀스런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진실게임을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여러 사람들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때 주인공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게임. 그것이 진실게임이다.
십 수년 전, 우리들만의 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젠 공중파 방송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무차별 송신되는 것을 보니 왠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손아귀에 비밀스럽게 꼭 움켜쥐고 있던 나만의 소중한 무언가를 전혀 엉뚱한 사람이 가진 것을 보게 될 때의 허무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손아귀에 소중하게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도 세월의 비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휩쓸려 간 것인지, 방송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하, 하고 새삼스럽게 그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진실게임을 할 때마다 나는 자세가 달라졌다. 두 귀는 한껏 쫑긋하니 세워졌고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목구멍에선 꼴까닥 침 삼키는 소리가 점잖지 못하게 연신 미끄러져 나왔다. 친구들의 비밀을 하나 둘 벗겨내는 것이 무에 그리 즐거웠는지 우리는 유치한 질문들을 던져놓고 마치 중차대한 회견이라도 듣는 양, 그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게임에 임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그 게임이 주는 묘한 분위기였다. 일단 진실게임을 하자고 하면 모두가 어떤 종교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심히 엄숙한 모습이 되어 자세부터 달라졌다. 그리고 게임의 주인공이 되면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자 하게되는 것이었다.
거짓말 탐지기가 있어 진실여부를 판가름해 줄 것도 아니었건만 그렇게 먼저 스스로를 발가벗기었다. 그것은 진실게임이 생명력을 갖게 된 열쇠이자 참 매력이었다.

파닥거리는 뜨거운 심장을 지닌 청춘답게 그 때 질문의 초점은 사랑하는 대상이 누군 지를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때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회피하고 말았을 질문이지만 진실게임이라는 의식 안에서는 거의가 한마음으로 고백을 하고 만다.
나 또한 주인공이 되면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참으로 앙큼하게도 정말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픈 마음은 끝내 토해 내지를 못했다. 물론 그것만 빼고는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최대한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난 충분히 진실했노라고....

어쩜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들 분위기에 취해서 맥없이 감정들을 흘리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꼭 지켜내고 싶은, 혼자서만 간직하고픈 것이 있었다면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선 나처럼 진실했었노라고 자신마저 세뇌시켰을 것이다.
어차피 게임에서의 진실이란 것은 그 순간의 진지함과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족해야 할 뿐, 모든 것을 다 밝혀내려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 되어 게임 자체를 경직되게 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게임은 백 퍼센트를 지향해서는 안 될, 그저 칠 부 능선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을 때 매력적으로 느껴질 그런 게임일 것 같다. 나도 그 정도만큼은 정말로 진실했었노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언뜻언뜻 진실게임을 떠올리게 된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벌거벗으려 한다는 점에서 글 쓰기는 진실게임을 많이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게임의 상대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다. 누구보다도 무서운 자신이 던지는 질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드러냄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정도를 조절하려고 애쓰게 된다.
때로는 다 드러내려 하다가도 주춤거려질 때가 있는 것이다. 굳이 발가벗지 않아도 될 일에 먼저 적극적으로 옷을 벗는 나를 보며 그것도 일종의 변형된 자기 만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그러하다. 하지만, 굳이 다 드러내지 않는다 하여 그것을 거짓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도리질을 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직접 면대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들에서 진실하기란 생각보다 더 쉽지가 않다.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라도 우리는 다 드러내지를 못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혹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까 하는 배려의 마음에서도 진실을 주저하곤 한다. 그에 비해 글은 진실에 다가서기가 한결 수월하다. 글 수다는 독백과 같아 귀 기울여줄 사람도 자신이기 때문에 숨결 느껴지는 사람 앞에 서 있기보다는 한결 자유롭고 편안하다. 그리고 체면 같은 것은 떨쳐 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하여 큰 갈등 없이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구덩이로 자신을 밀어 넣는 아픔을 주고 허방을 짚는 듯한 허탈감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그 감당은 온전히 자신만의 몫이기에 기꺼이 감내할 각오를 하게 된다. 어차피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는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아닌 이상 그렇게 자신의 삶을 글이라는 분비물로 쏟아내고 들여다보며 깨지고 부서지는 작업을 하는 편이 차라리 개운할 것 같다. 그래서 정말 감춰두고 싶은 얼마간의 진실이 있다해도 스스로 진솔해지고자 노력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줍잖은 글이나마 내가 글을 가까이 하며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지인이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글을 쓸 때 항상 차(茶)를 옆에 두지 않나요?"
글과 차가 어울려 보인다는 그이는 평소에 커피를 비롯한 어떤 종류의 차도 즐겨 마시지 않는 내가 조금은 의아했던 모양이다. 곁에 있던 다른 이는 차 대신에 담배가 글과 함께 떠올려진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비록 차와 담배가 없더라도 때로는 향긋한 차 향 스며든 글도 달콤하게 그려내고 싶고 때로는 얼큰한 술 힘을 빌려 몽롱한 중에 숨겨둔 치부까지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상상의 담배연기 속에 한 숨 섞인 하소연 한 자락 길게 뽑아내고 싶은 충동도 불쑥 고개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글 속에 가짜를 담아내지는 않는다. 글이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 속에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그리고 훈훈한 인정으로 마음을 데워주는 글을 담아내고 싶다. 맑은 물이나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는 따끈한 밥 같은 글을 소복이 담아내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오염된 가짜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진실게임을 하며 남의 비밀 들여다보기를 즐겼던 나는 지금도 글을 통한 타인의 생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 사람을 대할 때 예쁘게 화장하고 잘 꾸며서 빚어진 아름다움보다는 깨끗한 맨 얼굴의 아름다움에 더 감탄하게 되는 것처럼 글에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수려한 문장을 구사하고 잘 다듬은 글에서도 매력을 느끼게 되지만 그보다는 덜 세련되고 투박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진솔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더 사랑스러운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온기가 느껴지는 까닭이다.

오늘도 나는 진실게임을 즐기려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마음으로 쏟아내고 있을 그들의 진실을 향해 열린 가슴으로 사냥을 떠난다. 내 마음의 피와 살이 되게 해 줄 싱싱한 진실들을 먹기 위해 두 눈 번득이게 된다.

또한, 괜스레 외로움에 울고 싶은 마음이 될 때, 함께 라는 느낌이 절박하게 그리울 때, 나는 그물을 던지러 떠난다. 행여 운이라도 좋은 날이면 동지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그들이 손이라도 내밀면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안기고싶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또한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글, 누구나 내 글에 안겨 쉴 수 있을만한 푸근한 글을 낳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사람 내음 물씬 풍기는 글을 위해 나는 답답한 겉옷 한 꺼풀 벗어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