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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날


BY 선물 2004-02-18

봄이 오려나, 마음이 살랑살랑 가벼운 몸부림을 친다. 꽃보다도 바람보다도 내 마음이 먼저 봄이 된 듯 정신 없이 떠다닌다. 봄은 매서운 찬바람 끝자락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기별도 없이 어느 사이에 냉큼 고개를 들이민다. 새초롬한 눈빛이 여전히 칼날처럼 차가운데 그래도 봄바람이라며 한껏 화사한 옷 입고 나풀거린다. 그래서 봄인지도 눈치 못 챈 채 어수룩한 마음만 요동을 쳤나보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지만 원래 나는 봄을 좋아했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봄을 얄미워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봄 햇살은 따갑게만 느껴졌고 봄바람은 살랑거리는 여인네 궁둥이 같아 괜스레 실팍한 눈초리로 흘겨보곤 했다. 그래서일까, 꽃가루 날리는 본격적인 봄이 오면 내 피부는 늘 한 차례 가려움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내가 저를 시샘하는지 저가 나를 시샘하는지 우리는 서로 팽 토라져 도통 손 내밀 마음 없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꽃의 도시 일산으로 이사오면서부터 등돌렸던 내 마음이 봄에게로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다. 곳곳에 펼쳐져 있는 넓은 공원길마다 색색이 아름다운 꽃이 어우러져 근사한 화단을 만들었고 여러 채도의 초록은 봄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찬란한 빛을 연신 발해내고 있었다. 진작에 그 아름다움을 모르진 않았으나 애써 무덤덤하려 했던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니 여태 내 눈은 봄의 진실을 제대로 응시해 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저 봄이 오면 봄인가보다, 여름이면 또 여름인가보다 하며 그렇게 사계절을 무관심하게 흘려 보낸 나이기에 새롭게 만나는 봄은 참으로 신비롭고 황홀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봄이 찬바람 안고 오는 것은 생명을 잉태했기에 잔뜩 예민해진 까닭이리라. 마치 새끼를 밴 동물들의 사나운 보호본능처럼...

 그런 봄이 창 밖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먼저 찬란한 봄빛 가루를 온 집안에 흩뿌려놓았다. 다들 저를 찬미하려니 생각하고 우쭐거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젠 나도 그 높은 콧대가 마냥 밉지만은 않다. 그냥 인정해 주고 찬미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봄이 찬바람 거두고 화사한 본색을 드러내면 땅은 지천으로 흐드러진 꽃과 갖가지 봄나물들을 선사하는 큰 은혜를 베풀 것이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둔덕에서 엉덩이 약간 치켜올린 채 나물 뜯는 아낙들의 바쁜 손놀림도 보게 될 것이고 꽃을 배경으로 고운 모습 남기려고 사진 찍는 꽃 닮은 청춘들도 꽤 눈에 익은 풍경이 되어 그려질 것이다.

 또한 봄은 축 가라앉아 있던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선물해 준다. 학교 교정의 얼었던 땅도 봄기운에 스르르 몸을 풀게 되고 그 위로는 갓 입학식을 마친 햇병아리 같은 신입생들이 종종걸음치며 나부댈 것이다.

 껄끄러워진 입맛은 봄나물 삼총사인 냉이 ,씀바귀, 달래가 불을 댕기듯 입맛을 다시 돋구어 주니 생명을 잉태한 봄답게 사람에게도 활력을 주는 싱싱하고 넉넉한 계절이다. 내리쬐는 햇살에 춘곤증으로 꼬박거리며 잠을 쪼아대기도 할 테지만 그 또한 봄나물이 효험 있다하니 봄의 마음씀이 참으로 곱고 따스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 따뜻한 기운때문이리라.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기지개 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그 따스한 기운. 찬바람으로 얼었던 몸과 마음은 그렇게 내미는 봄의 손길을 덥석 붙잡으며 반갑게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흔히 봄날에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으슬으슬거리는 한기로부터, 내내 품고 있던 겨울의 우울한 어두움으로부터 벗어나 한껏 활개를 칠 수 있게 해 주는 봄기운처럼 우리네 인생에서도 고난과 역경 후에 반드시 일어서게 해 주는 따스한 봄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기대는 그래서 희망을 선물해준다. 하지만, 어떤 노래 말처럼 인생의 봄날은 가고 만다. 그것도 그야말로 봄눈 슬 듯 한낱 바람처럼 사라져 간다. 우리는 그저 봄으로부터 희망을 선물 받아 그것을 뿌리고 묵묵히 키워나가면 될 것이다. 봄이 던져 주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므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농사가 그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씨 뿌리면 절로 싹이 나고 알토란같은 결실을 거두게 될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한다. 기름진 땅과 하늘이 뿌려 주는 햇살과 빗물만 있다면 생명은 절로 열매 맺으리라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실한 땀방울의 힘이다. 인생의 봄날을 허무하게 녹여 버리고 싶지 않다면 부지런히 움직이며 갈고 닦아야 한다. 인생이라는 농사는 진심으로 몸과 마음을 다 쏟아야 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땀방울을 쏟아낼 때 햇살의 지저귐도, 봄나물의 후덕함도, 아름다운 봄 정경들도 모두 온전한 내 몫이 되어, 돌아오는 어느 가을날엔 입안 가득 휘파람 물고서 우쭐거리며 뽐내는 봄 닮은 모습으로 멋지게 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