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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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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달린 여자


BY 선물 2003-11-26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며칠 전, 차일피일 미루며 겨울코트를 사주지 못한 딸아이에게 두툼한 내 아줌마 외투를 껴 입혀 등교하게 했다. 그 동안 아이가 입고 다니던 겨울외투들은 등하교 용으로는 색깔이 너무 튄다는 이유로 학교에는 입고 다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 옷을 입고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정말 겨울외투 사 줄 일이 하루가 급해졌다.

그래서 지난 주말 딸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쇼핑 길에 나섰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니 앞으로 수 년간은 입혀야 할 옷이라 옷감이나 바느질 등이 제대로 된 옷을 골랐다. 아이 옷인데도 십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이다. 아이는 슬슬 눈치를 본다. 남방도 하나 갖고 싶은데 제딴에도 외투 값이 생각보다 비쌌나 보다. 남편은 두 말말고 남방도 함께 사 주라는 말을 했고 딸아이의 입은 함지박만하게 커졌다. 그러고 보니 아들 아이도 몸이 훌쩍 커 버려 겨울코트가 하나 필요했던 터라 나온 김에 몇 년은 입을 수 있을 만큼 큼직한 것으로 하나 고르게 되었다.

매장은 세일 기간이라 생각보다 옷 가격이 저렴했다. 평소에도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의 눈빛이 생기를 띤다. 그 눈빛을 따라가 보니 마네킹 위에 걸쳐진 콤비에 눈이 꽂혀 있다.
"자기 것도 하나 골라 봐요."
남편에게 옷 살 것을 권하였다. 남편도 한동안 옷을 사지 않아 입을 만한 옷을 장만해야 했던 것이다. 할인된 가격이 옷 하나 값에 둘은 살 수 있을 만큼 저렴해서 잠시 망설이던 남편도 큰 갈등 없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두 가지를 골랐다. 잠시 다음달 카드 결제가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했지만 추운 겨울 가족들이 따뜻하게 입을 겨울 입성을 장만한 기쁨은 그보다 더 크기만 했다.

남편은 아내의 옷을 사지 않은 것이 맘에 걸렸던지 옷 한 벌 골라 보라는 말을 건넨다.
"옷장이 비좁아서 옷 넣을 곳도 없어요. 그리고 옷 차려 입고 나갈 일도 없는데 옷이 왜 필요해요?"라는 말로 나는 남편의 말을 살짝 비켜 갔다.

그러고 보면 나처럼 옷에 관심도, 욕심도 없는 사람은 참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전에도 옷차림에 무관심했다. 쇼핑 자체를 싫어하는 편이라 엄마의 강권에 할 수 없이 옷을 사러 따라 나선다고 해도 별로 의욕적인 모습으로 옷을 고르는 일은 없었다. 그냥 처음 입어 본 옷이 대충 맞으면 바로 사 버린다. 물론 저렴할 경우에만... 아무리 맘에 드는 옷이라 하더라도 살짝 들춰 본 가격표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과하게 느껴지면 미련없이 포기하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옷을 사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맞선이라도 볼라치면 그 전날 급하게 옷을 사러 가야 할 낭패도 겪게 되었다. 옷을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도 아니지만 유난히 옷에 돈을 쓰는 일을 아깝게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결혼한 뒤에 산 옷도 열 손가락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십만 원이 넘는 옷은 단 두 벌 뿐이다. 그런데도 내 옷장은 잔뜩 배불러 있다. 모두가 주변에서 얻은 옷들이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있는 분들에게서 얻은 옷들이라 내가 산 새 옷보다도 훨씬 고급스럽고 내게 더 잘 어울린다. 가끔 주변에서 엄마들이 새 옷을 입고 와서 유명브랜드 옷이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찬탄하며 무슨 이야기인가를 해 주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어 그냥 미안한 듯 겸연쩍은 웃음을 보낼 뿐이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브랜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랑하고픈 마음으로 왔을 텐데... 정말 미안해진다.

그렇다고 옷 욕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친구들 엄마보다 우리 엄마가 초라해 보이면 너무 속상했던 경험이 있는 지라 아이와 관련된 사람을 만날 때는 좀 예쁘게 차려 입고 싶어진다. 또한, 남편의 아내로 어딘가에 얼굴을 내 비쳐야 할 때도 그렇게 세련된 모습으로 남편 체면을 세워 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친정에 갈 때도 잘 차려 입고 가서 딸 호강하며 사는 것처럼 보여 드리고 싶어진다. 그 외에는 정말 옷 욕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 번은 친구가 만날 때마다 똑 같은 옷을 입고 나온다는 말을 내게 해 준 적이 있었다. 솔직히 자존심이 무척 상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옷이 무지 질기고 편해. 그리고 매번 비슷한 시기에 널 만나는 것 같네..."라고만 답해 주었다. 내게 옷을 잘 선물하는 친정여동생은 비교적 옷을 고급으로 잘 입는 편이다. 유명브랜드 옷이 많아 보였다. 그런 동생에게 언니는 이상하게 그런데 관심이 없다고 말했더니 형편이 되면 자연스럽게 옷에 욕심이 생기게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고급 옷이 오래 입을 수 있고 편하고 또 품위있게 보이게 해 준다는 말과 함께...

옷은 날개라고 하는데... 그러나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 중에 입는 것만큼은 가장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물론 내 생활에 여유가 많은데도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면 더 그럴듯한 사람으로 평가받겠지만 지금 형편에서도 나는 충분히 검소하고 충분히 바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도 될 것 같다. 소시민의 한 달 치 월급보다도 훨씬 비싼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걸치는 사람들. 그런 사실을 걸러 내지 않고 날 것으로 방송함으로써 위화감을 조성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한 풀 꺾어 버리게 만드는 매스컴들.

나를 한 번 뉴스에 내 보냈으면 좋겠다. 몇 년째 너무나 잘 어울리게 입고 다니는 내 겨울 외투. 그 날 딸아이에게 입혀 보낸 그 따뜻한 옷의 가격과 함께... 그 옷은 속된 말로 땡처리한다는 매장에서 심혈을 기울여 골랐던 단 돈 천원 짜리 옷이다. 지금도 가장 즐겨 입는 내 소중한 옷이다. 나는 옷에 관한 한은 옷이 날개가 아닌, 생각이, 정신이 날개인 여자라고 자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