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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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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다귀 해장국


BY 선물 2003-09-24

작년 겨울, 아주 추웠던 어느 날이다.
남편이 새로이 시작한 일의 성격상 아파트 게시판 작업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아르바이트를 써도 되지만 자기 일처럼 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남편과 나는 퇴근 길에 직접 그 일을 하기로 마음 먹고 준비하여 나갔다. 게시판 작업이란 아파트 게시판에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고 보통 그 작업을 하면서  문고리에 광고지를 거는 일도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고리 작업은 불법이라서 하면 안된다고 하여 부녀회장한테 물었더니 우리 부부를 보며 너무 양심적이라고 하면서 적당히 알아서 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양심적이라기 보다는 우리 부부가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아무 것도 몰랐다는 말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생전 처음 그 일을 하면서 정말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문고리를 걸며 맨 꼭대기 층부터 내려 오는데 그래도 불법이라고 하니 가슴이 콩닥거리며 다리까지 후들 후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겨우 1층이 다 되어 갈 즈음 그만 어떤 할머니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우리를 보신 그 할머니는 갑자기 "요즘 자전거가 계속 없어지던데 다 이런 일 하는 사람 짓인것 같어" 하시는 것이다. 그러자 연세 드신 분 앞에서는 항상 예의 바른 사람인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고는 정말 속상해 하며 뭐라고 한마디 할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정말 애꿎은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일단은 남편부터 말리려고 마음 먹었다. 남편도 그저 씁쓰레한 표정을 한 번 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날은 춥고 어두워지고 손은 얼고... 그래도 아파트 하나는 끝내 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일을 해 나갔다. 남편은 힘들어 하는 나를 보더니 아래 현관층에서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혼자서 그 일을 마무리 하고 오겠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돌아 온 남편의 표정은 역시나 밝지를 않아서 나 또한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어떤 집에 문고리를 걸려고 하는데 문에 아파트 현관 열쇠가 꽂혀 있어 벨을 눌러 주인한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마운 맘이 들어야 했을텐데 그 집 주인은 눈을 딱 내리깔더니 열쇠만 낚아 채듯 가져 가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문을 닫더라는 것이다.나는 남편의 그말을 듣는 순간 남편이 느꼈을 차가운 바람이 느껴져서 차마 남편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정말 괴로운 마음이었고 괜스레 초라해 지는 것만 같았다.

남편은 비교적 귀하게 자라면서 정말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살아 왔고 자존심도 센 사람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많이 참고 견디는지 오히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는 내 가슴이 아리기만 했다. 정말 내가 초라해지는 것보다 남편이 초라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더 괴로웠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우리 아파트에서 그런 일 하시는 분들한테 그렇게 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때때로 벨을 눌러서 강매하려는 사람들한테는 좀 쌀쌀맞게 대하기도 했던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일을 겪으면서 무슨 일을 하든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못할 일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일생을 살아 가는 동안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게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데 늘 겸허해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늦은 밤에 벌벌 떨며 돌아오는 길에 둘이서 뼈다귀해장국을 시켜 먹는데 남편이 내 차가워진 두 손을 잡아주며 말없이 쳐다보는 눈빛이 아마 나와 똑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서로 미안해 하면서도 안되어 하는 마음. 그러면서 나는 언제든 내가 남편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줄 수만 있다면 많은 힘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남편과 함께 먹는 유난히 따끈 따끈했던 그 날의 뼈다귀해장국은 정말 맛이 일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