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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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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과 흉


BY 선물 2003-08-31

가끔 남편이 기분 좋을 때에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어렸을 때부터 짖궂었다는 남편은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지금까지 옆지기인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며 즐거워 한다.그러나 그 장난이란 것이 때로는 나에게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아픔을 주기도 하는데 주로 `꼬집기'의 고통이 그 중 가장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남편으로서는 옆에서 종알거리는 아내가 귀엽게 느껴질 때 좋은 기분으로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조그만 아픔조차 싫어하는 나는 꼬집힌 부분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얼마 뒤 시퍼런 멍자국을 증거자료로 제출하면서 넘치는 사랑을 그만 자제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게 된다.

내 몸은 비교적 약한 자극에도 멍자국이 잘 남는 편이다.남편은 그 자국을 자신의 장난의 결과임을 여간해선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젠 정확하게 표시까지 해가며 철저한 증거자료를 챙겨 들이미는 나의 주도면밀함 앞에서는 더 이상 두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도 남편은 나도 한 번 그런 즐거움을 만끽해 보겠노라며 똑같은 강도로 남편에게 물리적 힘을 가한다면 절대로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낼 것이다.실제로 겪어 보진 못했지만 안 봐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내가 남편에게 되갚음 할 때는 그동안의 아픔 그만큼을 똑같이 갚으려고 별렀던 맘때문에 속상함이 그대로 실린,기분 나쁜 물리적 행사가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의 장난이 즐거운 애정의 산물이라면 기꺼이 그 정도의 멍은 감수할 수 있다.
더구나 아픔을 의도하지 않은 멍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하지만 그러한 멍과는 달리 흉은 지워지지 않은 상처의 흔적이다.상처를 입었을 때 잘 치료해서 아물리지 않으면 어김없이 흉이 남게 된다.비록 상처가 아문 자리에 남은 흔적일 뿐인 흉이라 해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한은 볼 때마다 아픔의 기억이 살아날 것이다.그래서 더 큰 아픔으로 남는 멍이라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흉보다는 나을 것 같다.아마도 그래서 자녀들을 키울 때 보기 싫은 흉은 남기지 않으려고 부모들이 많은 주의를 하게 되는 것같다.

나 또한 장난으로 던지는 돌에 맞아 죽고 마는 개구리처럼 남편의 장난스런 꼬집음이 많이 아프고 속상하지만 기껏해야 사라질 멍밖에 남기지 않을 것이기에 진심으로 갖게 되는 서운함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 남게 되는 그런 흔적과는 달리 마음의 멍과 흉은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남편과 함께 살아오는 세월동안 때로는 내 마음에 멍이 들기도 했고 때로는 흉이 남기도 했다.멍은 세월의 명멸과 함께 생겨났다 또 사라지기도 하지만 문제는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큼지막하게 남아 있는 흉들이다.나는 되도록이면 내 마음 곳곳에 남아 있는 흉을 들춰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보게 되면 또 다시 아픔이 생생하게 살아 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흉들이 비단 남편과의 관계에서만 남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살아 오면서 맺게 된 여러 관계들 속에서 때로는 멍투성이가 되어 내동댕이 쳐지기도 했을테고 때로는 아픈 상처를 입고 채 아물리지도 못한 채 또 다시 그 상처가 건드려져서 딱지 딱지 앉아 차마 못 볼 흉이 되어 남기도 했으리라.그 아픔이 하나같이 다 멍이었다면 참 좋았을텐데...그랬다면 지금쯤은 아픔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매끈한 마음으로만 가볍게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흉만 부여 안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그동안 참으로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힘들게 갖게 된 지금의 평화로운 작은 행복들을 지켜 가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그 흉들을 들춰보고 싶진 않다.하지만 그런 생각만 하면서 꼭꼭 숨기려고만 한다면,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 깊숙히 또아리 틀고 있을 흉들로 인해 언젠가는 이 소중한 평화를 잃게 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흉들을 안고 사는 인생길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이왕 없앨 수 없는 흉이라면 다른 새 살들을 이식해서라도 그 자국위에 덧바르고 싶다.그리고 이제 그 때가 왔다.
한 때 잘 나가던 대기업의 성실하고 유능한 사원이었던 남편은 개인사업을 시도하다가 몇 번의 실패를 하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남편이 겪었던 고통과 좌절을 곁에서 지켜 보았기에 `가장'이라는 무거운 굴레 속에서 힘겹게,그러나 여전히 묵묵하고 성실하게 식솔들을 이끌어 가는 남편에 대한 연민은 내 마음의 흉을 덮어 줄 새 살이 될 것이다.또한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이 아내를 위해 스스로를 많이 접어 주는 모습을 보일 때 그 고마움이 내 흉을 덮어 줄 새 살이 될 것이다.내 몸에 생기는 그 장난스런 꼬집힘으로 생기는 예쁜 멍들도,아내의 입에 넣어 주는 맛난 고기 한 점도 그렇게 하나 하나 새 살이 되어 내 흉을 덮어 갈 것이다.

이 글을 쓰는동안 갑자기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남편에게 가보고 싶어진다.그 사람이라고 나로 인한 흉 하나 남아 있지 않을 것인가...
지난 밤 또 어려운 일이 생겨 밤새 고민하고 뒤척이며 잠 못 이루었을 남편은 지금 곤하게 잠들어 있다.잠든 그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어지는 나는 이제 성형 실력이 제법인가보다.남아 있는 흉이 그리 많지 않음을 느끼니 말이다.흉을 사랑스런 새 살들로 변화시켜 나가는 나는 멋진 `성형내과 '의사이다.그런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