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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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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BY 선물 2003-08-28

급히 전화를 할 곳이 있는데 제 자리에 있어야 할 무선 전화기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아이들은 가끔씩 어떤 물건을 쓰고 난 뒤 제 자리에 도로 갖다 놓지 않을 때가 있어 전화기의 소재를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다.그런데 티브이를 보고 있던 두 아이는 모두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바쁜 마음에 같이 찾아 보기라도 하라고 했더니 그저 건성으로 찾는 시늉만 하고는 못 찾겠다며 다시 티브이 앞에 앉는다.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에 아이가 전화를 썼던 기억이 있어서 속이 타던 나는 엉뚱한 유인책을 내 놓게 되고 말았다.
"누구든지 전화기 찾는 사람은 내가 특별히 컴퓨터 게임 시간을 보너스로 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큰 아이는 1분도 채 못 되어 멀쩡하게 전화기를 찾아 온다.그런 유인책을 내어 놓으면 그저 좀 더 성의 있게 찾을 것이란 생각만 했던 나는 순간 화가 버럭 나고 만다.`알고도 귀찮아서 찾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 보너스는 무효'라고 해 버렸다.어른이나 아이나 비슷한 수준의 감정 다툼은 이렇게 시작된다.이제 머리도 제법 굵어지고 무엇이든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한 사춘기의 큰 아이는 나의 그런 변덕이 잘못 되었다고 또박또박 항변한다.
처음에는 티브이를 보다 말고 일어 서야 했기에 대충 찾은 것이 사실이지만 컴퓨터게임이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침대에서 전화기를 쓴 기억이 났다는 것이다.그래서 베개를 들쳐 보았더니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찾게 된 것인데 괘씸한 마음은 괘씸한 마음이고 약속은 약속이니 그렇게 말을 번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괜히 시끄러워 지는 것도 싫었고 또 딴에는 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그냥 내 뜻을 굽히고 만다.좀 더 일관성을 갖지 못한 내 변덕을 반성도 해 보면서...
그런데 아이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든 그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 재래식 펌프를 본 기억이 있다.
펌프질 하기 전에 먼저 펌프 위로 얼마간의 물을 부은 뒤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게 보여서 서툰 펌프질을 놀이 삼아 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그러면서 그 조금의 물이 깊은 곳의 물을 그렇게 끌어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인상깊게 느껴졌다.최근에야 그 윗 구멍에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이로 하여금 그렇게도 빨리 전화기를 찾게끔 만든 그 유인책을 생각하면서 차마 마중물에 비유하기엔 유치하지만 그래도 그 마중물 생각이 그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살아 가면서 맺게 되는 여러 관계들 속에서 목 말라 하는 것들이 제법 된다.
아이들에게는 점잖고 위엄 있는 엄마로서 존경과 신뢰의 물줄기를 끌어 올리고 싶고 남편에게는 지적이고 우아한 아내로서 사랑과 존중의 물줄기를 끌어 올리고 싶으며 시댁 식구들께는 똑 부러지고 바지런한 며느리가 되어 귀염과 신뢰라는 그런 물줄기를 끌어 올리고 싶다.
그러나 어느새 아이들에겐 꽉 막히고 통하지 않는 엄마가 되었고 남편에게는 시시각각 빈 틈을 보이며 기선 제압에서 져 버린 만만한 아내가 되었으며 시댁 분들께는 서툴고 어리숙한 며느리가 되어 버렸으니 내 바람대로 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나의 마중물은 없는 것일까?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어야 하고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단순하고 즉흥적인 가벼운 마중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 보았던 글귀 하나가 떠 오른다.`인간을 긍정하고 세상을 긍정하라!'
어쩌면 내가 준비해야 할 마중물의 해답이 이 글귀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아이들을 긍정하고 남편을 긍정하고 시댁을 긍정하며 또한 세상을 긍정하려는 나 자신까지 긍정한다면 그것이 내가 원하는 물줄기를 시원하게 끌어 올려 주지 않을까?
긍정.그것은 곧 받아 들임이며 인정함이라 할 수 있다.그러니 아이들을 긍정하게 되면  아이들을 존중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며 감정대로 대하기 쉬웠던 엄마의 모습은 변화할 것이다.남편을 긍정하게 되면 양보의 미덕을 베풀 것이고 인생의 길을 나란히 걷는 동반자로서의 아내 역할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또한 시댁을 긍정하면 늘 억울함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단절 시켰던 마음을 회복시켜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될 것이고 세상을 긍정하게 되면 보다 투명하고 밝은 눈으로 따뜻한 세상을 감싸 안게 될 것이다.


누구나 진심으로 원하는 삶이 있고 그 속에서 잘 화합할 수 있는 관계들을 원할 것이다.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한 번 쯤은 마중물을 준비해 볼 일이다.나의 마중물 또한 허공에 맥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마음의 실로 가슴에 꿰어 두고 물을 끓어 올릴 때마다 두고 두고 꺼내 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