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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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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은 며느리


BY 선물 2003-07-28

"시부모님 모시고 살 수 있나요?"
이것이 아쉽게도 멋있는 청혼을 기대했던 제 눈에 멋있게 보인 남자의 청혼이었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청혼이라 그저 기쁘기만 했으니 돌아본 그 시절의 전 참 바보같은 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좋아라하며  "예" 하고난 뒤부터 예비남편으로부터 귀염을 받았으니 세상 여자들은 어쩜 절 한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쫄레 쫄레 예비남편을 따라다니며 맛있는 것도 많이 얻어 먹고 좋은 곳도 많이 다니며 구경하고 참 신나는 연애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맛있는 김치전골을 먹으러 갔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을 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남자는 전골냄비에서 뭔가를 건져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돼지고기였는지,쇠고기였는지 확실히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고기건더기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둘,셋,넷,다섯..
좋은 남자가 젓가락으로 집어서 제 하얀 밥위에 얹어준 것은 그렇게 다섯개의 고기건더기였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딱 이렇게만 낳아요.아들 딸 가리지 말고..." 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함할 말이였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저는 그저 맥없이 배시시 부끄러워하며 웃기만 했답니다. 이쯤되면 정말 제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겠지요.


그러나 한번 사람에 빠져드니 정말 이성이란 것은 맥을 잃었고 그저 그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고 그 현실이 주는 아픔도 겪었지만 여전히 꿈을 갖고 행복을 꿈꾸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위로 시누이신 형님들이 네 분 계십니다. 그러니 제 남편은 4녀 1남의 막내이면서 삼대독자였던 것이지요. 저희 친정어머니는 막내 며느리로 시집와서 어른들꼐 귀염받고 2남2녀를 두고 다복하게 사셔서 시집살이란 것에 대해서도, 아들을 `꼭'낳아야 하는 자리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잘 모르시고 그저 잘해 드리면 그만큼 귀염받고 살 수 있다라고만 생각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외며느리로 시집간 저는 첫 딸을 낳았습니다. 남편은 어머님께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라고 합니다. 전 그것이 참 싫었습니다. 왠지 세상에 나온 딸아이에게 잘못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진짜로 죄송한 일은 아니지만 그냥 인사로 그렇게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다고 했고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어머님께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는지에 대해서도 전 지금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씀 드렸다고 해도 조금도 억울한 일은 아닌 듯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딸을 낳았다고 해서 제게 손톱만큼의 서운함도 내색하지 않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째아이를 가진 후로는 어머님이나 남편과는 상관없이 저 자신이 마음을 편히 갖질 못했습니다. 어머님은 제 배를 보시더니 여자아이가진 배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시면서 걱정말라고 또 낳으면 되지 않냐고 하시면서 그렇게 웃어주셨습니다.


전 저대로 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넷이든 다섯이든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을테니 걱정마셔요라는 말까지 겁없이 내뱉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의 전 몇세기를 뛰어 넘어 옛날로 돌아간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양수검사를 하거나 초음파검사를 해서 아들이란 것을 안 산모들이 남편에게 미리 근사한 외식으로 한턱 대접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전 다른 부러움보다 그저 맛있는 외식생각만 간절했던 아직은 철없는새댁이었습니다.


임신 7개월때 남편과 전 초음파검사를 하러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아직도 아들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던 저는 만약 의사선생님이 아들이라고 하기만 하면 맛있는 밥을 사달라고 해야지,그 생각만 하며 침대에 누웠습니다. 검사하시던 분께 "전 어차피 아이가 딸이든,아들이든 상관않고 낳을테니 성별을 좀 가르쳐 주세요."하고 간절히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보이질 않네요.그것이..." 라고 하셨지요. "그럼 아들이 아니란 말씀이네요.그런데 백퍼센트 확실한건가요?" 제가 힘없이 재차 물어보자 검사하시던 분은 자세에 따라 아들도 안 보일 수 있다며 저를 위로하셧습니다.


뭐라도 사주겠다는 남편을 뒤로하고 전 지친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선 아무런 질책도 않으시는 어머님께 계속 아들 낳을 때까지 낳을테니 걱정마시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해드렸습니다.
물론 지레 겁먹은 저 혼자만의 발명이었지요. 드디어 산기가 보이는 날이 왔습니다. 어머님은 병원으로 향하는 저에게 아들 신경쓰지 말고 모쪼록 건강하게만 낳고 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두고 두고 어머님을 제 맘속에 품는 고마운 말씀이 되셨지요. 그 말씀이 언제나 어머님으로 인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며느리가 고맙게 떠올리며 맘을 추스리는 일이 될줄은 어머님도 미처 모르셨을겁니다. 첫아이 낳을 때는 너무 힘들어 혼절했던 저였지만 둘째때는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음을 신고하는 첫울음소리(고고)를 듣자마자 전 성별을 물어보았고 전 뜻밖에도 "고추입니다.축하드립니다."라는 인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후 분만실 밖에서 할머니 한 분이 덩실덩실 춤추고 계시다는 어떤 분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춤추고 계신 분은 저희 어머님이셨습니다.


옛날 어머님은 출산하실 때마다 친정에 함께 살던 시누님도 함께 출산하셨는데 어머님은 내리 따님만 네 분을,그 시누님은 아드님만 세분을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은 고초가 차마 글로 담을 수 없을 정도이셨으니 두번의 출산만에 아들 낳은 며느리가 참 신기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사대 독자를 낳은 저는 예전에 남편이 밥숟가락 위에 얹어준 다섯 점의 고기 건더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딸하나,아들하나 둔 300점 며느리입니다.


그래도 전 자매나 형제를 둔 주변 이웃을 보면 또 부러움 가득한 마음이 생기니 제 욕심도 어지간은 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 당사자를 생각하고 후일의 재미를 생각하면 사실은 자매를 두신 분들이 가장 좋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게 됩니다. 어머님은 아들 하나에 잠시 더 욕심을 가지시긴 했지만 요즘 세상에 자식 하나 더 키운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아시는 터라 어렵지 않게 그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지금은 훌쩍 엄마키를 넘으려는 많이 자란 아이들을 보며가끔씩 옛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초음파검사했던 날,결과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근사한 식사나 했을걸,소심한 맘에 그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 아직도 아깝다는 투정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