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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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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물흐르듯 그렇게 살고싶다.


BY 선물 2003-07-19

# 1 #


남편이 차를 몬다.  나는 남편의 차를 타면 먼저 윗쪽의 손잡이를 꼭 붙들게 된다. 그리 바쁘지 않아도 남편은 촌각을 다투는 사람마냥 액셀러레이터를 계속 밟는다.차가 숨가빠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끼익..하고 밟으면 내 몸은 앞뒤로 한 번 출렁이며 춤을 춘다.
"여보,제발 속도를 늦춰요.전 빨리 달리면 앞쪽에 펼쳐진 풍경들이 날 마구 덮치는 것 같아 너무 불안해요.속도감을 느끼는 것이 정말 싫어요."
그제서야 남편은
"그래,내가 요즘 왜 이렇게 급하게 차를 모는지 모르겠네."라고 답하며 차에게 숨고를 틈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계기판의 속도계는 어느새 빨간 바늘을 오돌오돌 떨며 아슬아슬하게 올라가고 있고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내 손에는 흥건한 땀이 고여 있다.


질주하는 차들은 때로는 서로를 배척한다. 앞서려는 차는 성난 모습으로 불쑥 끼어들기도 하고 남편은 그럴 때마다 평소와는 달리 결코 교양을 갖춘 어른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될 말들을 내뱉고 있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아마 급한 사정이 생겨서 그럴거예요.누가 아프든지,아니면 엄청 중요한 약속이 있든지..그러니 우리가 조금 양보하면 그 양보가 다른 사람에겐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선행이 될지도 모른다구요."
남편은 `그래,너 잘났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휙 쳐다보더니 그냥 웃고 만다. 그 웃음에 나는 또 재잘거림을 시작한다.
"여보,난 운전을 하면 함께 달리는 차들이 다 친구같아요.그래서 우리는 함께 흘러가는 물처럼 그렇게 즐겁게 달리게 되는 것처럼 느껴요.특히 밤길엔 불빛들이 얼마나 따뜻해 보이는지 몰라요..나와 같은 시각에 같은 길을 달리는 차들은 그래서 다정하게 느껴 지던데.."
남편은 그 말을 들으며 어느새 속도를 늦추고 깜빡이를 켜고 들어오려는 차들에게 기분좋게 양보도 한다.물론 이런 날은 남편 컨디션이 좋은 날이리라.

# 2 #


일주일에 한 번 서는 아파트 장이 열렸다. 나는 사야할 것들을 조목조목 적어서 지갑과 함께 들고 장보러 간다. 아침 이른 시간에 가면 장사하시는 분들앞에 나는 저자세가 된다.
아침개시부터 물건값흥정도 어렵거니와 덤을 원하는 것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난 내가 개시한 집이 하루종일 장사가 잘 되었다는 덕담을 듣고 싶어 한다. 내겐 별로 도움도 안되는 칭찬이지만 때로는 그것도 욕심난다. 그래서 알뜰주부가 되려면 되도록 오전장은 피하고 오후
좀 늦은 시간에 장을 보러가야 한다.


어머님이 그러신다.
"10원이 모여서 100원,100원이 모여서 1000원,그렇게 되어 한 푼 두 푼 모으는 것이 참말로 알뜰한거다."
그러나 나는 물건값 깎기가 결코 쉽질 않다.
`그래도 내가 주부 14년차인데 이젠 소리도 좀 지르고 용감한 아줌마티를 팍팍 내야지,맨날 사람좋은 얼굴하고 다니니까 정말 사람들이 날 너무 만만하게 생각해' 하며 속으로 한 판의 결전의지를 불태운다. 드디어 저만치 앞에 장사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떤 할머니가 억지를 부리시는지 실랑이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이다. 결국은 할머니가 당신의 뜻을 못 이루셨는지 잔뜩 찌푸리신 모습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금전의 그 각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냥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과일장앞에 선다. 수박이 한 통에 13000원이라고 적힌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아저씨,수박 달아요?근데 비싸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작전에 들어간다.
"아,달지요.이건 장마에 물에 들어간 수박이 아니라서 그런 싼 과일과는 질이 달라요.이것 맛 좀 보세요."하며 칼로 수박 한쪽을 잘라서 불쑥 내민다.
"음,달다.아저씨,맛있고 큰 걸로 수박 한 통 골라주세요.여기 수박 맛있더라."
그리고 잠시 있다가
"그리구요.11000원에 해주세요.네?" 애교까지 섞어가며 나의 눈물나는 과일값 흥정은 시작되었다. 속으로는 12000원에 살 요량이었지만 흥정을 하자니 11000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계산이 나왔다.
"왜 이러세요.아줌마,이 수박은 물들어간 수박이 아니라니깐요.정말 거의 원가로 드리는거예요.제발 이번만큼은 깎지 마세요.담에 꼭 싸게 드릴게요.이거 하나 팔아서 몇 푼 남지도 않아요."
장사의 이문없다는 말은 하늘도 용서하는 삼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지만 그래도 정색을 하고 한마디로 자르는 아저씨가 미워졌다.
"아저씨,제가 여기서만 과일을 사는데 그동안 한 번도 저한텐 안 깎아주시더라구요.목소리 크게 하고 반은 억지쓰는 아줌마한텐 깎아주고 저같은 사람에겐 생전 가야 한 번 안 깎아주니 정말 속상하네요."
나도 어느새 목소리 큰 아줌마가 되어 이번엔 제법 내 실속을 차릴 것만 같다.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에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돈을 12000원 내밀자,그 아저씨가 그럼 12000원짜리 수박을 가져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오늘은 정말 비싸게 가져와서 싸게 못준다면서 아까 전에 내가 짓던 그런 웃음을 이번엔 그 아저씨가 내게 보낸다. 난 그냥 지갑에서 1000원을 더 꺼내들고 만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1000원이 아마 나보다 저 아저씨한테 더 필요할거야,더운 날씨에 저렇게 힘들게 장사하시는데 그것 깎았어도 내 맘이 불편했을거야.'
결국1000원을 더 받은 아저씨는
"아유,아줌마.아줌마같은 분들이 정말 잘하시는 거예요.아까 할머니 고집 부리시다 결국은 그냥 가셨잖아요.그럼 미움밖에 더 받아요?"하며 나를 칭찬한다. 장사하시는 분들에게 칭찬 받는 어리숙한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시어머님께 깎았다는 자랑거리를 장바구니에 같이 담아오지 못하는 것이 못내 서운해진다.

# 3 #


나는 똑똑하지가 못한 사람이다.그러나 언제나 내겐 친구가 있고 적이 없다.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나같은 사람같고 나도 손해본다고 느끼며 살지는 않는다.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겠지만 실상은 내가 조금 양보한 것이 내겐 다시 몇곱절의 무게로 평화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한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내게도 미움담아둔 마음이 있다.그런데 돌아보니 그 마음이 지옥이었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내가 가장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누군가에 대해 끊임없이 이해하고 사랑하면 그 때의 내 마음은 정말 평온함을 갖게 되고 잔잔한 행복도 느끼게 되어 오히려 누군가를 사랑하게 해준 그 사람에게서 고마움을 느낀다.


결국은 사랑도,미움도 나의 마음에 달려 있고 자잘한 일상속에서 무엇이 값진 것인지를 잘 판단하며 살아가면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물흐르듯 사는 나는 결코 바보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