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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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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꽃


BY 생각하는 이 2004-11-11

        대꽃 그 날 뒷산 무덤가에 하얀 쌀꽃처럼 퍼질러 핀 개망초는 빈 가죽만 남은 상구아제의 손에 뚝뚝 자지러지고 있었다. 스무 살 더벅머리로 건너 마을 푸성귀로 끼니를 삼는 열 아홉 처녀와 혼인을 한 후 염소 떼를 몰고 풀을 먹이면서도 개나리 봇짐을 싸는 바람처럼 헤죽거렸다. 열 아홉 진달래 꽃잎처럼 불그레한 왕궁 댁은 잔 솔가지로 타닥타닥 불 지펴 모락모락 보리쌀이 익을 때면 푸성귀로 현기증을 앓던 모진 세월이 떠올라 그으름처럼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리고 늙은 누렁이가 새끼를 서너 번 낳은 어느 봄밤에 왕궁 댁은 첫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울음이 잦던 그 날 대나무 숲에서 우둑우둑 바람이 불었다. 큰아들 놈이 아장아장 논둑을 헤집고 봄볕이 흐드러지게 부서지던 날 성구아제는 농협 빚을 얻으러 읍내로 갔다. 손바닥만한 논배미를 저당하고 몇 푼 받은 빚은 불안해지는 농사의 끝물 같은 희망이었다. 어둑해지도록 오지 않는 성구아제를 기다리던 왕궁댁은 날이 밝아 동네 이장이 들려 준 얘기에 그만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간밤에 성구아제는 읍네 노름방에서 일년 농사를 고스란히 털어 내고 있었다. 왕궁댁은 한동안 새벽으로 밭에 엎드려 호미질을 하고 흙빛으로 저물어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쓰러지곤 했다. 안개가 동네를 덮치던 어느 새벽, 왕궁댁은 멀리 기적소리를 놓치고 개망초처럼 짓이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을은 흉흉한 넋이 떠돌고 성구아제 앞마당엔 망령이 든 대꽃이 하얗게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