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으로 금새 빗줄기를 쏟아 낼 수 있을 만큼 하늘이 푸르게 깊어지면 내 생각의 깊이도 걷잡을 수 없게 커가는 것을 느낀다.
가냘픈 허리를 휘감고 태초의 모성으로 씨를 키워가며 햇살을 애무하는
나팔꽃을 보면 나는 지난 그리움으로 몸서리를 친다.
헤어짐이라고, 그래 그 여름을 떠올리기 충분한 나팔꽃으로도
나는 절실한 추억 앞에 서 있다.
차라리 강둑이 아니라 저수지같은 느낌이 드는 산자락 아래에
그와 내가 그 여름 날 풋풋한 젊음으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시집 한권이 있었으며
사색의 깊에 물들었던 나는 철학책을 쥐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그 때 그의 모습을 흑백 삽화처럼 간직하는 것은
그 시절이 아름답고도 슬퍼서 일 것이다.
그를 어느순간 놓아버린 어설펐던 헤어짐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결코 지금의 현실이 아파서도 아니고
돌이켜 가고 싶은 것은 더 더욱 아니고
그저 한 시절을 추억하는 내 감성속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그날 그와 내가 나누었던 사소한 얘기들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오래된 필름처럼 흐리게 왔다가 사라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며, 세상에 대한 내 아픔 때문 일 것이다.
세상에 지쳐갈 때 한 번쯤 뒤돌아보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학창시절 일 것이고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는 사람 때문 일 것이다.
누구나 그 아름다운 시절을 가슴에 묻고 살지만
아무 때나 꺼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움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세계로 가는 것은 휴식같은 것이다.
나는 그 해 여름에 그가 내 손목에 토끼풀꽃으로 만들어 준
꽃팔지와 꽃반지를 해마다 찾아오는 여름이면
도지는 병처럼 용케도 기억을 해냈다.
그리고 그가 불러 준 편지라는 노래도......
오늘같이 귀뚜리가 피울음으로 가을을 토해낼 때면
듣지 않고선 못견디는 어니언스의 편지를 들으며
그 해 내가, 또 그가 꾸었던 한 시절의 꿈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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