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타고난 성격은 내성적인 경향이 강한지 외향적인 경향이 강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할머니랑 살다가 부모님이랑 살게 될 무렵, 나는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신생아 처럼 모든 것이 낯설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좀 큰 읍내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좀 이른 7살 나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처음 본 학교는 얼마나 커보이던지...... 학교가 내게 커보이는 것 만큼 새로움에 대한 공포도 그만큼 컸다. 그 읍내에서 처음 살게 된 집도 남의 집 대문간 단칸방(두쪽으로 나누어 쓸수도 있는 두칸짜리 방)이었다. 그 집에서는 둘째 여동생이 태어나기전 까지 약 1년 반동안 살았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고 맨날 엄마한테 "엄마 5원만!"해서는 5원 받아서 콩 사탕 사먹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는 아기 낳으러 할머니댁에 가버리시고 이모가 기다리고 있다가 날 새집으로 데리고 간 것이 나와 새집의 첫대면이었다. 읍내의 우리집은 정말 내맘에 꼭 드는 멋진 집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운치를 더하는 그런 마당 넓은 집이었는데, 봄이면 천리향의 향기가 진동을 했고 여름이면 앵두나무아래에서 혼자 꿈을 키웠고 가을이면 감나무에 감이 열리는 그런 아름다운 집이었다. 대문간 돼지우리에는 아버지가 키우시던 흰돼지가 살았고, 금계며 꿩이며 잉꼬, 십자매, 문조...그런 아름다운 새들도 우리식구로 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도 난 여전히 숫기없고 찔찔 잘 우는 내성적인 아이었다. 이를 무심히 넘길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지....^^* 아버지는 내성적인 내 성격을 바꾸어줘야 한다고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퇴근후면 산책도 데리고 다니면서 이야기 나눌 기회를 만들어 주셨고, 숨바꼭질 같은 놀이도 같이 놀아주시면서 밝음을 유도하시기도 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한잔드시고 퇴근을 하셔서는 우리(여동생과 나)랑 놀아주셨다. 더운 여름날 밤이었는데, 밖에서 숨바꼭질도 하며 놀다가 마당에 펴논 평상에서 수박을 나누어 먹었다. 뛰어놀다 더 더워서 수박을 많이 먹었을까? 그 다음날 아침 난리가 났다. 아버지는 약주 드신 후 주무셔서 그런지 물을 찾으시다 물을 쏟아서 이불을 버렸고, 동생과 나는 동시에 요위에 세계지도를 거창하게 그려놓고 말았다.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지만 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괜시리 아버지와 내가 공범(?)이란 느낌 때문에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해 동지(同志)의식을 가진 듯하다. 그 이후 난 조금씩 밝은 아이로 변해갔다. 3학년이 되면서는 선생님이 칭찬을 해도 부끄러워서 울어버리는 그런 아이가 더 이상 아니었다. 학급간부도 하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기 시작했으며 공부에도 눈이 뜨이기 시작했고 아버지께 " 아버지 하느님은 어디 있어요?"라는 질문도 할 줄 아는 쾌활한 아이로 변해갔다. 그때 아버지가 그 질문에 대해 내게 말씀해주신 그 답을 지금 내가 내 아이 에게 그대로 쓰먹고 있다. " 하느님은 니 마음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니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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