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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바씨


BY 참솔향 2003-07-17

再자 榮자 쓰시던 우리 할바씨는 정확히 나에겐 증조부시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할바씨'라고 부르라고 내게 그러셨다.
어릴 땐 남따라 "할바씨, 할바씨" 했지만
머리에 먹물이 좀 들어간 후엔 '할바씨'가 어감이 좀 상스럽고 해서
표준말 배운대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니,
아이구~~~상스러운 말이라면서 '할바...씨'가 존대말이라고 우기시는데
어린 맘에도 더 어쩌지 못하고 "예" 하고 말았다.

아무튼 우리 할바씨는
다른 모든 사람에겐 진짜 호랑이셨지만 나에게만은 종이 호랑이셨다.
할머니랑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시며 싸우시다가도
내가 " 할바씨~~그라지 마이소. " 그러면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시던 우리 할바씨.

할바씨는 내가 토요일이 되어 시골 내려갈 때 마다
꼬깃꼬깃 지갑에 넣어두었던 쌈짓돈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꼭 " 연필이랑 책 사라이."하는 말을 남기셨다.

늘 사랑채에서 혼자 기거하시던 할바씨는 토요일에 내가 내려오면 나랑 같이 자기를 은근히 바라셨다.
할바씨 많이 연로하셔서 사랑방에는 냄새도 좀 나고 했지만 나는 할바씨랑 같이 자야할 것 같은 의무감에 할바씨 옆에서 자고 오곤 했다.
할바씨랑 같이 자드리는 것이 말없이 나를 사랑해주시던 할바씨의 사랑에 대한 조금의 보답이라고 생각했었다.
할바씨는 내가 자는 동안 거의 가버린 시력으로 더듬더듬 변소에도 다녀오시고 내 이불도 다독여 주시고 혼자서 부시럭 뭔가를 잡수시기도 했다.

어느날,
걸음걸이가 많이 불편 하셨던 할바씨랑 나의 화려한(?) 외출이 시작되었다.
할바씨는 나랑 둘이서 할바씨가 돌아가실 자리를 보러가기를 원하셨다.
그때 아마 나는 아직 국민학생 이었을거다.
할바씨는 그 뒤로도 더 장수하셔서 내 고등학교 시절에 돌아가셨지만,
할바씨는 이미 선산에 할바씨의 자리를 마련하시고 계셨었다.
어린 나와 다리가 불편하신 할바씨에겐 제법 먼 산행!
덕곡을 지나,저수지 물에 빠져가며, 더듬더듬 드디어 당도한 할바씨의 그곳.
할바씨는 먼훗날 내가 할바씨 찾으러 못올까봐 그렇게 손수 할바씨 계실 곳을 내게 보여주셨다.
"이제 니 혼자 찾아오것제? 할바씨 찾아 와야한다이."
그래도 그때는 할바씨랑 같이 돌아왔었다.
돌아오는 길은 피곤해서 할바씨도 나도 더 힘들었다.
자꾸 넘어질 것 같고 걸음이 더딘 할바씨를 채근하며 내가
"할바씨, 발을 높이 떼어야 안넘어지지예." 이 한마디를 했는데,
아이구~~~우리 행이 세근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할머니께 " 우리 행이가 내가 넘어질라니까 걸음을 높이 떼라고 시키더라."며 행이가 다 컸다고 좋아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할바씨 아픈 줄도 모르고 턱도 없는 소리를 했는데도 할바씨는 그저 내가 대견하고 기특하고 그랬나보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면,
나는 늘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금방 돌아가실 것 같은 할바씨를 한번 더 보고 또 보고 눈에 담고 가슴에 담고.....
다시 못 보면 어쩌나......
그렇게 자꾸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가길 여러 해,
결국 할바씨는 가셨다.
할바씨랑 내가 보러갔던 그 곳에 가셨다.
그리곤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하지만 할바씨는, 종이 호랑이 내 할바씨는
언제나 인자하신 모습으로 내 가슴에 살아계신다.
여름철 갯가에 동네아이들이랑 놀러나갔다가
행운으로 잡은 해삼 한마리를 너무 좋아서 할바씨 드리겠다고 가져왔는데,
그동안 해삼은 흐물흐물 다 녹아 버리고 형체만 흘그머니 남아있어도
우리 행이가 잡은 해삼이라고 달게 드시던 할바씨 모습 그대로 남아계신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흐른다고 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