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이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제일 무섭던 시절이 있었다.
조모이를 못본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조모이는 내 첫사랑이자 정신적 지주이자 고향이었다.
그러던 나도 결국 조모이 손을 내가 먼저 놓았었다.
조모이가 이 세상에 더 머문다는 것이 고통일 것 같아
"할매, 이제 그만 가이소."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가 조모이는 서운했을까?
우리 '조모이'!
이 세상에서 白자 鳳자 順자 이름으로 살다 가셨다.
나의 증조 할머니.
나는 '조모이'라고도 불렀고 '조모이 할매'라고도 했다.
'아야할매(많이 아프셔서 사촌 오라버니들이 그렇게 불렀다함)'라고도 했다지만 나는 그리 불러보진 않았다.
조모이를 생각하면 나는 울컥울컥 감정이 솟구치는 병이 있다.
조모이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아 내 가슴에 다 품고 살기에 너무 벅차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조모이는 정말 순수하게, 통채로 날 믿어주고 품어주시고, 끝없이 너그러우셨다.
우리 조모이는 일찍 부모를 여의시고 혼자서 세상을 이겨나가는 법을 체득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생활력 강하셨고 고집도 대단하셨고 입바른 소리도 잘하시던 분이다.
그런 성격 때문에 때론 남의 오해를 사기도 하셨지만, 나에게만은 한번도 궂은 소리를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학교 다니면서 주말에 제일 큰 스케쥴이 할머니 뵈러 내려가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화기관이 약해 많이 먹어대지 못하는 체질이라 나는 할머니 댁에 내려가면 단단히 각오를 하고 가곤했다.
할머니께서 나 오면 주겠다고 얼마나 다양한 음식들을 모아두었을지 안봐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매~~~"하면서 대문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우리 조모이는 음식을 가지고 나오기 시작하신다.
동네잔치에서 가져온 떡이며 과일, 삽싸름한 배추뿌리, 삶아 논 고동, 고구마, 감, 사탕, 요구르트......
뭐라도 조금 더 먹이고 싶어하는 조모이 심정을 내가 아는 지라 나는 최대한 많이 먹어내야 했다.
내가 조모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조모이가 주는 족족 맛나게 먹어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무리를 하다 결국 탈이 나고 만다.
그러면 조모이는 안타까워 '화풍단'이란 소화제를 먹여가며 그래도 조금 더 먹이고 싶어하셨다.
기억나는 할머니 댁에서의 참 평화로운 장면 하나,
새벽녘 일찌감치 일어나신 조모이는 아궁이에 재를 치시고, 닭모이도 만드시고, 남새밭에도 다녀오시고, 마당도 정리하시고, 요강도 비우시고...
따끈따끈 요밑이 기분좋게 데워져 올때면 나는 설핏 잠이 깨지만 밖에서 나는 할머니의 기척을 들으며 평화로운 게으름을 피우며 누워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가마솥 여닫는 소리가 나고 고소한 냄새 솔솔 나면 나는 조모이 계란찜을 기대하며 슬그머니 일어난다.
살뜨물 받아 할머니 기르신 닭이 낳은 계란을 풀어 깨소금 송송 뿌린 계란찜은 사랑이란 이름의 감미료도 첨가되었기에 내가 먹어본 계란찜 중에 제일 맛난 계란찜 이었지.
보따리 보따리 할머니 체중보다 더 많이 나갈 것 같은 짐을 머리에 포개어 두개씩이고 양손에 하나씩 들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사랑을 나르시던 분.
여름날 증손녀딸 더위먹을까봐 잠 못 주무시고 부채 부쳐주시며 모기 쫓아주시던 분.
내게 찌찌를 만지게 해주시던 유일한 분.
이젠 그 분을 기억하는 시간보다 잊고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
하지만 그 분이 내게 남긴 사랑이 전해져
내가 타인을 사랑 할 수 있고
팍팍한 삶속에서도 낙천적인 꿈을 꿀 수 있고
사랑을 줄 때는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며 산다.
내가 콩을 팥이라고 우겨도 믿어주실 정도의 조모이의 신뢰를 받았기에
나는 못난 것이 기 안죽고 당당하단 소리 들으며 살았다.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