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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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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끝자락에서서


BY 밥푸는여자 2003-10-18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동네 한바퀴를 타박 걸음으로 걸었다. 
  구름 위를 걷듯 조심스런 발걸음에도 
  왼쪽 아픈 가슴은 통증이 여전하다. 
  코끝에 닿는 저녁공기는 꽃향과 숲향에 
  섞여 벅찬 환희를 가져다주고 
  우거진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나뭇잎 사이로 파고들어 가을소리를 낸다. 
  여름에 미리 듣는 가을 소리라...음... 
내가 사는 동네는 언제나 거리에 인적이 없다. 사람 소리보다는 오히려 작은 짐승소리가 훨씬 낯익은 곳이다. 좌선하듯 앉아있는 토끼도, 날쌘 다람쥐도 이방인의 등장에 놀라운 기색도 없이 빤히 바라본다. 동양인이 낯설긴 한가보다. 어차피 빠른 걸음이 되지 않은 바에야 노을빛 비끼는 길을 즐기며 걷고 싶었다.
태고부터 자리를 지켜 왔음직한 큰 나무 아래 섰다. 나무 중간쯤 조각가가 깍았을 것 같은 정교한 구멍이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은데 혹시 다람쥐들 집이라면 실례나 되지 않을 까 싶어 서성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낯선 나그네의 방문에 위기를 느낀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와 숨을 할딱이며 제 집으로 들어간다. 다람쥐의 몸 동작이 얼마나 날쌔고 재미있었는지 혼자 피식 웃었다. 그래.. 의지력 없이 살아갈 것 같은 나무도 제살을 깎아 남에게 내어주고 함께 어루러져 사는구나...
집집마다 아늑한 불빛들이 하나 둘씩 켜지며 사람의 온기가 불빛 따라 새어나온다.새어나온 불빛 따라 그네들의 행복이 춤추며 달려든다. 가지런하게 장단 되어진 뜰마다 초록 잔디는 칙칙 돌아가는 물뿌리개 소리를 음악 삼아 목을 축이며 혼자 걷는 객에게 제 빛깔만큼 싱그런 미소를 코 끝에 던져주고 이름 모를 작은꽃들이 초록위에 소담하게 웃고있다. 이제 곧 아쉬운 이별을 두고도 작은 행복을 전해준다..참 귀하다..
같은 나무인데 같은 꽃들인데 주인에 따라 꾸며진 품새가 다른 것을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 언어도 모르던 어느 사람인가 이곳을 거닐었겠지... 아주 오래 전 사랑이란 단어도 모르는 어느 사람인가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겠지... 계산되어지지 않는 그들만의 언어와 방법으로...
노을빛이 무채색으로 바뀌어 새어나오는 불빛이 더 환해진다. 발걸음을 집으로 채촉했다. 여름 끝자락에서서 .. 2001/8/ 밥푸는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