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까지는 아주 느릿느릿 걸어와도 오분이였다.
정문 맞은편의 우리약국을 지나면 유리집이 나오고 양장점이 나오고 곰보아줌마의 수동상회를 지나가면 호떡집, 그 호떡집을 지나면 문구점이 있다.
나는 문구점에서 예쁜 편지지와 엽서사기를 좋아해 새로운 것이 들어왔나 늘 문구점을 기웃거리다 광희네 집을 지나 우리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집으로 돌아와 교복을 벗어놓아도 학교 수업을 파하는 종소리가 방안까지 들어왔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시골서 유학 온 친구의 자취집에 앉아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냈다.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내기로 했는데 나는 '대지''숨은꽃''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닥터지바고'를 읽으며 아버지의 와이셔츠 빈상자에 가득채워진 엽서를 꺼내 마음속에 출렁이며 흩어지던 생의 아름다운 느낌을 잡아 적어논 그들의 이야기를 닮고 싶다고 했다.
방의 주인인 순옥이는 시골 집 마당에 피어있는 목련화의 희고 순결한 고운자태를 닮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책에서 라일락이라는 꽃이름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고 했다.
얼마나 꽃이 예쁘면 꽃이름이 그 처럼 세련되고 멋질까... 라일락이라니...
아마도 목련화보다 꽃봉오리도 크고 눈부시게 화사할것임에 틀림없을것이라며
나도 이제 도시의 이름을 닮은 라일락꽃을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시간을 내서 찾아본 라일락꽃을 보았을때의 그 실망감과 허탈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우리는 분분한 꽃잎처럼 웃어댔다.
그때 옥주는 소중한 것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원히 잠재워야 하는것이라고 제법 어른스럽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되어 여러번의 계절을 보내며 먼 시간을 지나왔다.
이제는 꽃잎이 들어있는 예쁜 편지지에 바른글씨로 그리움을 전하고 안부를 묻는일은 오래된 책상서랍에 묻어놓은 채 전자 메일함에 익숙해 졌다.
언젠가 은사님으로 부터 온 편지가 있었다.
나는 옛 스승님이 나를 기억해줄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뛰어난 학생도 아니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또 다른날 같은 메일주소로 편지가 들어왔다.
은사님의 존함을 놓고 몇날을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이 아닌 학과목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것이라고는 한문선생님이였다.
첫날 일일히 출석 체크를 하시면서 이름과 얼굴을 익히시던 선생님께서는 나의 이름을 부르시고는 "저녀석 눈 좀보게. 그녀석 눈 똘망똘망하다. 눈빛이 살아있네."하시며 수업 들어오실 때마다 불러세우며 질문을 하셔서 일년동안 한문만 죽어라 공부한 적이 있는데 한문 선생님은 아니셨다.
그리고 내가 잊을수 없게 칭찬을 받은것은 가정선생님으로 부터였다.
여고 삼학년 그 당시 이십년 후 내가 살집을 설계해보라는 것이였는데 그 숙제는 너무도 신이났다.
그 당시 가구로는 자개농이 사라지고 티크농이 한참 나올때 나는 방마다 가구를 없애고 과감하게 붙박이장을 설치했고 벽을 보고 부엌일을 하는 주방을 거실과 마주보게 놓이게 하며 가족과 이야기를 하며 식사준비를 할 수 있도록 부엌가구를 설치했다.
그리고 거실을 통해 계단을 올려 지붕위로 다락방을 하나 놓았는데 천장이 유리로 되어 비오는 것을 그대로 볼수있고 눈이 내리는것도 볼수 있고 별빛과 달빛이 쏟아지게 하는 유리로 다락방의 천장을 마무리 했다.
선생님께서는 교탁위에 놓인 내 공책을 한참 바라보시다가 내 이름을 부르셨다.
그리고는 나를 한참 바라보셨는데 그 눈빛은 내가 선생님들로 부터 그동안 받아본 가장 신뢰와 믿음과 사랑이 담긴 눈빛이였다.
"이거 네가 그렸니?"
"네."
"그래. 아주 잘그렸다. 이렇게 해놓고 살아라."
"그런데 이거 너 혼자 그린거니?" 하고 거듭 물으셨다.
나는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도 흡족하고 행복해 보이셔서 자신 있게 "네."했다.
선생님께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등도 두드려주시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내 설계도를 칠판에 크게 옮겨고 내 설계도를 가지고 수업을 하셨었다.
쉬는 시간에 반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몇주간이나 잊지않고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셨었다.
나는 그때 참 우리학교가 좋다고 생각했고 내 교복이 어쩌면 이렇게 내 몸에 편하게 딱 맞을까 하는 느낌을 갖았다.
담임선생님외에 나를 기억해주실 선생님은 그 외에 아무리 생각을 돌려놓아도 찾아낼 수없었다.
사는일이 녹녹치 않아 편지를 잊고 있었다.
올 겨울 모교를 찾아가는 일이 있었다.
오분이면 걸어가는 길은 여전했지만 순옥이, 나, 옥주 이렇게 셋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도 넓었던 그 길이 혼자 걷는데도 좁게 느껴졌다. 그 넓었던 길은 다 어디로 간것일까.
학교가 보이는 골목입구에 들어서면 어머니가 빨래를 털어널던 옥상이 있던 우리집은 주인이 바뀌며 높은 건물이 들어섰다.
그 정다웠던 문구점도 서점도 양장점도 수동상회도 사라졌다.
학교운동장에는 그때 내가 갖았던 꿈을 가진 학생들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손목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들도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저 3학년 2반 창가의 사루비아꽃을 바라보며 키워나갔던 꿈을 향해 이만큼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부딪힌 어려움에 한번도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결코 놓아버리거나 굴복하면 안된다는 집념이 내 생에 대한 애정이였다고 한다면......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 기운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교무실로 들어섰다.
교무실에 들어섰는데 "나를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구나"하시며 편지를 보내주신 스승님이 맞아주셨다.
"......아."
머리가 반백이시고 늘 인자한 웃음을 짓고 다니셔서 손에 들은 회초리가 아무런 위력도 발휘되지 않았던 부모님같았던 스승님.
전혀 나를 기억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없었던 스승님.
공부를 잘한것도 아니고 뛰어나지 않았으며, 예쁘지도 않았던 한 아이를 스승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내아이를 내놓고 품고 있는 어머니인듯 제자를 세상에 내놓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품고 한아이 한아이 놓치않고 바라보고 있는 스승님.
어딘가에서 목련화처럼 살아가고 있을 순옥이,
소중한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옥주,
나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내자리에 앉아 선생님께서 열심히 애써 가르치시는 그 학문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눈빛이 똘망한 착한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