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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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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2장


BY 어지니 2003-06-25

 “넌 왜 그 인간만 만나러 갔다 오면 이렇게 앓아 눕는거야! 정말 내가 못 살아!"

 매섭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던 그녀는 급기야 고열을 동반한 독감증세로 이어져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그 동안까지가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고 설레임이었다는 것이 서러울 뿐이었다.

그런 일들은 TV에서만 시청자들의 관심도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쓰여지는 잔인한 발상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일이 되어 이렇게 가슴을 찢어놓을 줄은 꿈에도 그려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베인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려진 듯 가슴이 쓰라려왔다.
눈을 뜨기만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상 만사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나....나 말야....이제 정말...그 사람이랑 끝내버릴 거야...."

"누워...얼음찜질 해줄게."

"끝내버릴 거야....흑흑흑....정말....정말 끝내버릴 거야."

다짐이라도 하듯이 몇번이고 되뇌이는 그녀의 말은 그녀자신에게 하는 아픈 다짐이었다.

"울지마...그렇게 울면 머리가 더 아파진단 말야."

싹수가 노란 그 새끼 제발 좀 잊어라! 라는 말이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꾸욱 꾹 눌러 참으면서 정민은 이부자리를 펴주었다.

 수면제와 감기 약을 함께 목구멍안으로 처넣으면서 나경은 다짐하듯이 말을 했다.

약국에서 금기시하는 짓을 하면서까지 잠들려고 하는 친구가 영마땅찮았지만, 정민은 말을 아끼며 방을 나와버렸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에 부시시 깨어났을 때는 그녀가 누운 침대가에는 콧물을 닦아낸 휴지가 수북이 쌓여져 있었다.

 따르릉.

 “나경아, 내 말들어, 흥분하지말고 먼저 내말부터 들어.“

“오늘도 미안하지만, 나경이가 아니에요.

까마귀 고기처럼 느글거리는 이 인간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지랄 염병이야! 새고 샌것이 남자건만...병신!

 “아! 미안합니다, 정민씨...나경이 좀 바꿔주세요."

 “미안하지만...이번에도 그럴 수가 없어요."

 "“정민씨.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만 말해줘요. 그사람에게 꼭 해야할 말이 있어요.“

  “왜 기혁씨만 만나고 들어오면 꼭 저렇게 앓아눕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지독하게 아파요. 수면제먹고 간신히 잠들었어요."

 “......“

 “근데, 이번엔 또 뭐에요? 뭐가 또 틀어진 거에요?"

 “일이 또 묘하게 꼬였어요..."

 "늘 매번 그렇게 일이 꼬이다니 좀 신기하단 생각이 드네요....혹시 인연이 아니란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정민씨...."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은데요. 두사람은 그다지 좋은 인연이 아니에요...그렇게 서로 가슴에 상채기만 내는 사람들이 좋은 인연이라고 보기엔 좀 그렇지 않아요?"

 큰 고랭이 벌레처럼 짜증난 음성으로 너무나 딱부러지게 말하는 정민의 말에 기혁은 어떤 구실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건은 구실을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 솔직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플라워는 기혁에게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 그것은 자신의 입장일 뿐...누구에게도 허용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나경, 그녀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기혁은 절대로, 결코 그냥 그렇게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둘 중 하나는 작살을 내버렸을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좀 괜찮아지거든...전화 달라고 꼭 좀 전해주십시요...꼭...부탁드립니다."

거의 반 애원조로 말하는 그에게 그만 씨부렁거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또 꾸욱 꾹 눌러 참으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게 전하긴 하겠지만...나경이가 전화를 할런지는 모르겠네요."

 “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끝내버리겠다고 했으니...그렇게 쉽게 통화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나경이 저래뵈도 한번 마음먹으면...지가슴이 썩어 문드러져도 하는 애라서.“

 “네...아프지 말라고 전해주세요...그리고, 기다리고 있다구요.“

 폰을 내려놓은 기혁은 며칠 쉬어야 할 숨을 한꺼번에 내리쉬면서 소주병을 집어들었다.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은데요. 두사람은 그다지 좋은 인연이 아니에요...그렇게 서로 가슴에 상채기만 내는 사람들이 좋은 인연이라고 보기엔 좀 그렇지 않아요?.... 끝내버리겠다고 했으니...그렇게 쉽게 통화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나경이 저래뵈도 한번 마음먹으면...지가슴이 썩어 문드러져도 하는 애라서....]

 나경아! 지금 내 기분도 지랄같다. 지랄같다구! 우린 왜 이렇게 엉키기만 하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에 몰두하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지만, 그녀의 침묵시위는 그가 예견해 잡아 두었던 날짜에서 한참을 넘어서고 있었다.

 “너 요즘 철학 공부하냐? 얼굴이 왜 그모양이야?“

며칠째 사무실에 출근은 고사하고 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직원들의 연락이 영훈의 폰에 수십건이나 남겨졌다.

당장에 달려와 녀석의 가슴에 묻어있는 김 나경이라는 여자의 흔적을 빡빡 밀어내고 싶었지만, 영천에 출장인지라 이제서야 달려온 것이었다.

영훈은 짐짓 모른 척, 술잔을 연신 들이키는 기혁을 쳐다보았다.
친구 놈의 말에 피식하고 웃고 말았지만, 정말 패쇄론자가 되버린 느낌이었다.

 “술이나 진탕 마시자.“

 “무슨 일 있구나, 너.“

 “일은 무슨...월말도 지났고, 비도 오잖아.“

 “철학가랑 마주 앉아 마시는 술 맛이 어떨지...그래, 마셔보자.“

 소주를 번갈아 한병씩 해치우고, 다시금 술병 테이블 위에 놓여지는 순간, 핸드폰의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경이? 당신 맞지?“

 “기혁아...“

 출장에서의 여독이 집으로 돌아오자 곱절로 영훈의 어깨를 짓이겨오는데다 한잔 두잔 마시는 술에 눈꺼풀이 무거워져왔다.

그런데, 지금 친구의 꼬락서니가 영 말씀이 아니었다.
기혁의 핸드폰이 아니였다.
 기혁과 맞은 편에 앉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핸드폰이였는데, 기혁은 울리지도 않은 핸드폰에 대고 나경이라는 여자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영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이 새끼! 아주 중증이구만.

 “아, 아니였구나...내 폰이 아니였어..“

 직접적으로 이별하자는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이별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에워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마치 손가락으로 양미간을 지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 장마비가 일주일째 지겹도록 내려지는 날 정오 무렵...

나경은 블랙의 핫미니스커트에 블랙가방, 블랙구두를 신고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했다.
김 경호 콘서트가 있는 날이었다.
그녀의 죽쓰는 기분을 전환 시켜주기 위한 정민의 배려였다.

"나 혼자만 가서 어떡하니..."

"엄마가 안 계시니 내가 여길 지켜야지. 그리고, 난 김 경호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잘 다녀와...거기 다녀와서 니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좋겠다."

 "고마워...."

그다지 좋아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얼마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인가....

 때맞춰 비가지 오다니....

 나경은 콘서트가 처음이었지만, 그 열광적인 분위기속으로 한껏, 양껏 빠져들었다.

나경이 나가고...두어시간 지났을 무렵.
전축을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어딘가에서 김 경호의 노래가 들려왔다.
콘서트에 가면서 두고 간 나경의 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기혁이리라 어림짐작하며 나경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어 울려대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다.

 “여보세요."

 "괴팍한 성격치고는 목소리는 그런대로 들어줄 만 하네."

정민은 다짜고짜 성격을 운운하면서 시비조로 말을 걸어오는 상대편이 바로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쌀을 찌푸렸다.

이 인간이 어디 세일하는데만 다녀왔나. 엇따대고 말을 깍아내리고 있어!

 "누구세요?"

 ""이것봐요, 김 나경씨. 사람이 그렇게 베베 꼬여서 엇따 써먹겠어?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거지. 까놓고 말해서 발가벗고 뒹군 것도 아닌데 말야."

 "이것보세요. 전 김 나경이 아니지만,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요?"

 "나경씨가 아니다? 웃기지 마쇼. 폰이 울리지마자 받아든 장본인이 나경씨가 아니라니...이렇게 꼬인 여자가 어디가 좋아 그 모양인지 원."

 "이 사람이, 정말! 그러는 당신은 누구에요?"

 "나요? 나, 박 영훈이요."

나경에게 박 영훈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사람은 기혁이라는 사람의 친구쯤되는 모양이군.

 “이것보세요. 박 영훈씨...댁도 기혁이라는 사람처럼 느글거리는 까마귀 고기 같은 거 알아요?!...전화를 했으면 먼저 자신을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정도 에티켓도 없는 사람이 누가 누구한테 꼬이고 어쩌고에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댁 친구때문에 내 친구는 거의 죽을 지경이라구요!"

정민은 기혁에게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자르륵 쏟아내기 시작했다.
본인의 일은 아니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이니 참아야 하고, 남자니 그럴 수 있다는 말은 정말 넌더리가 났다.

 "정말 나경씨가 아닙니까?"

 "그래요!"

폭포수인 것처럼 거칠 것 없이 내뱉어내는 그녀에게 그제서야 영훈은 성질을 누그러뜨리면서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친구를 보면 친구를 안다더니....하여튼 싹수가 노란 인간들이야!

 "아! 이거 미안하게 됐어요...나경씨는 요?"

 “나경인 지금 콘서트가고 없어요.“

 “그렇군요. 자기 때문에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술병만 거머쥐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나경씬 콘서트 장엘 갔군요."

 "이보세요. 원인 제공한 사람이 제 일 다하고, 온전한 생활을 한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에요? 우리 나경인 거의 죽을만큼 아팠다구요. 그러면서도 나경인 한번도 기혁씰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건 기혁이도 마찬가지예요. 이름이 뭐죠?“

 “김 경호요.“

 사오정이 따로 없구만.

 “지금 전화 받고 있는 그쪽 이름 말이예요.“

 “아...전 김 정민이예요.“

 “그렇군요...정민씨..미안합니다.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죠...내가 처음부터 말이 너무 과격했어요.....오해하지 말아요. 그저 지켜보는 내가 가슴 아프단 말이었으니까요. 그 놈한테 나경씨는 이제 느낌이라는 허상이 아니라, 절절한 현실인데...서로 왜 그렇게 엇나가는 지 답답해서 말입니다."

 “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정민씨...이번 한번만....이번 한번만 더 기혁일 봐주라고 해줘요....서로 절절히 사랑하면서...그렇게 헤어지게 놔둘 순 없잖아요."

그건은 영훈의 말이 맞았다.

설혹, 헤어진다 해도...기혁이란 인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나경인...나경인...그렇게 조금씩 가을 낙엽처럼 자신을 죽여갈거야....

 “네...그렇게 꼭 전할게요.“

 “다음 통화때는 정민씨와도 좀 더 즐거운 일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쓰디쓴 머구잎을 입에 문 사람처럼 정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회색하늘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