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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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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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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1장


BY 어지니 2003-06-23

 여름의 심통인가.
여름의 끄트머리에 장마비를 무색하게 할 만큼의 비가 삼일 연속으로 내리고 있었다.
우두두 우박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소리 때문도 아니거만, 나경은 불면증 환자처럼 제대로 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성격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정민의 티박처럼 정말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동이 틀 무렵까지 잠들 수 없었던 나경은 서랍 속 깊이 숨겨 두었던 수면제를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그 다음날 시간이 걱정되긴 했지만, 나경은 오히려 정적이 전부인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끈거리는 두통 증세는 미간을 찌푸리며 했고, 급기야는 수면제를 삼키게 했다.

쓴 약기운 때문인지 주룩 눈물이 나왔다.
그 눈물을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그녀의 볼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약을 먹고 한나절 넘게 침대에서 뒹굴던 나경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

 가슴 부분에 비쥬 장식이 있는 연보라색 끈나시에 청바지, 그리고, 실제 나비크기의 보석이 부착된 은 목걸이로 한껏 멋을 내고, 저녁 식사 시간 무렵에 집을 나서는 나경에게 정민은 어디가냐는 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쑥스러운 듯 미소짓는 나경은 정민의 배웅을 받으면서 택시를 탔다.

 나경은 그 언젠가처럼 같은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기 위해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네, 장기혁입니다. 저는 지금 업무 중에는 전원을 죽여놓는 아주 나쁜 습성이 있죠. 하지만, 음성을 듣는 즉시 바로 응답을 드리는 좋은 매너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휴우~

 나경은 무너지는 기대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의 연결은 실패했지만, 그에게로 가는 길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안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목적지에 내린 나경은 다시금 기혁과 연결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

 나경은 자판기에서 두잔의 커피를 빼들고, 곧장 피씨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땅덩이를 밟고 있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으로 쓰러질 것 같은 가슴에 조금의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느긋하게 커피향을 느끼면서 나경은 전원이 켜진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클릭했다.
점수를 잃을 때, 순간순간 열받아 가면서 게임을 즐기는 동안,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후두둑...
여전히 세상을 적시고 있는 빗소리에 나경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 새벽 4시였다.
지금은 아침 7시...
지금쯤은 집에 와 있을 것이다.
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나경은 두 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화장실에 들어선 나경은 이마 아래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화장을 수정하고..옷 매무새를 매만졌다.
 게임을 하면서 억지로 삭였던 그리움이 빼꼼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룰룰랄라...
나경은 아침 요기로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것으로 사들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그의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여전히 초임벨은 고장난 상태 그대로였다.
컴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초임벨 하나 제대로 고치지 않는 것...그것마저도 나경은 좋아보였다.
너무 빈틈없는 사람은 답답하고, 재미없으니까...

 나경은 현관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짜자잔...느닷없이 나타나면 놀라겠지?

 다섯 번에 가까운 벨울림 소리에 잔뜩 목이 잠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장 기혁입니다.“

 “비가 오고 있어요.“

옹졸하게 굴어 미안하다는 말을 할까 하다 그녀는 언젠가 그가 그랬던 것처럼 비가 온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었다.

 “나경이?“

 “목소리가 많이 안됐어요.“

 “응..어제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술 마셨거든...그래..근데, 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보고 싶어서...“

나경은 보고 싶다는 말을 동시에 현관문 나경은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도 그래...응..잠깐만, 누가 왔다부다...이시간에 누구지?“

 누구긴 나지.

 어떤 모습일까...
잠에서 금방 깬 후라 조금은 부시시하고, 흐트러진 모습이겠지만, 그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설레여왔다.

 철컥하는 문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니....너! 나경아!“

 10센치 간격 앞에서 놀라워하는 기혁에게 핸드폰과 먹걸이를 흔들어 보이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과 설레임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그가 빼꼼히 현관문을 열었을때...현관앞에 가지런히 놓인 여자의 검정 구두와 그의 구두를 보아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아 하마터면 욱하고 헛구역질을 할 뻔 했다.

 “포커스. 난 커피 마실건데...우리 함께 마셔~~~~"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인 하이힐의 소유자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그를 포커스라는 컴 안의 닉네임으로 부르고 있었다.

 포커스? 플라워!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이 반가움보다는 뭔가 석연찮음이 베어 있음을...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챈 것이다.

 “포커스..누가 온거야?“

 플라워인 듯한 여자가 기혁을 포커스라고 지칭하면서 찰싹 달라 붙는 것을 지켜보게 되다니...
 
브래지어 모양새인 슬리브 나시티에 엉덩이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숏팬츠를 입고 있는 플라워는 거의 나신에 가까운 옷차림이었다.

 힘들게 표정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예고없이 들이닥친 댓가치고는 너무 괴퍅스러웠다.
어이가 없다는 말로도 부족하고, 너무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을 때, 이미 들고 있던 먹걸이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몸은 홱 돌아서 아파트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걸 조건반사적인 행위하고 하나?

 이런...이런! 우라질..!!

당황하고, 당혹스러운 것은 기혁도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달음질 쳐 돌아서는 그녀를 단숨에 붙들은 기혁은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를 이해시키려 했다.

 “나경아. 내 말 들어봐....부산에 잠깐 일이 있어 왔다가..비가 갑자기 오잖아. 그래서 그런거야. 플라워가 부산이 처음이라...어쩔 수 없이."

 그의 습관적인 친절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놔!“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소매 끝에 닿기라도 한 것 처럼,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면서 그녀가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다.
 
 기혁은 깜짝 놀라서 그녀의 팔을 놓고 말앗다.
지금껏 그렇게 앙칼진 모습을 보지 못한 터라, 기혁은 그녀가 [놔!] 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팔을 놓고 말았다.

 만남이라고 해봐야 일년전의 만남을 다 합해도 열손가락 안에도 들지 않지만, 그렇게 앙칼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떤 원인으로 실랑이를 할 때도 마음 반쯤은 열고, 한결같이 자신을 기다려준 그녀였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기혁에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으로부터 완벽한 단절을 원하고 있었다.

 손을 드는 그녀 앞으로 택시가 세워졌고, 이를 꽉물고 울음을 참으며 일분도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 속에 여운이란 것도 없이 사라져가는 나경은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