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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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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19장


BY 어지니 2003-06-23

똑...똑...

"네. 들어오세요."

여관에 거주하면서 무턱대고 들어오라는 말은 위험천만한 말이었지만, 익숙해져버린 공간에서 오는 태만으로 나경은 그렇게 말해버리곤 아차 하며,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말을 해도 또 그런다. 그러다 얼씨구나 하고 정신나간 놈이라도 들어오면 어쩌려구."

정민 모친은 속으로 요즘 젊은 것들은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말을 되뇌이면서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민이 아니면, 어머니 이실 거 같으니까....다음부턴 조심할게요."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떤거야?"

"이젠 많이 좋아졌어요.....저 은근히 엄살이 많잖아요."

"죽을 좀 끓였다. 먹고 좀 더 누워 있어. "

"죄송해요...저 아니라도 바쁘신데..."

"별 말을 다 듣겠네. 넌 내 딸이나 진배가 없다...얼릉 먹고 기운차려야지..."아, 그리고...어제 장 기혁이라는 사람이 맡기고 갔다....어제 보니 니 창가 아래에서 한참을 섰더구나.....너 아프다는 말을 했더니 자기가 아픈 것처럼 끙끙 거리드라구. 전화라도 좀 받아주지 그랬니...."

괜실리 신경질을 내면서 핸드폰의 밧데리를 빼내던 정민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그가 맡기고 갔다는 상자를 받아든 나경은 상자를 쳐다보기만 할뿐...쉽사리 열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리는 것을 그 상자를 여는 순간...쓰러진 가슴은 또 다시 장 기혁이라는 남자를 찾게 될 것이 뻔하므로...

나경은 정민의 모친이 끓여다준 죽을 다 먹고, 커피를 한 잔 할때까지 기혁이 가져다준 상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참을 성은 거기까지였다.
기혁에 관한 한 그녀의 인내심이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눈이 부신 연두빛 장미에 나경은 코끝 찡함도 없이 그만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이 남자는 나를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버리지...
아무 때고 나를 울게 하고, 아무 때고 나를 웃게 해버려....

손을 뻗치지기만 하면 폰을 쥘 수 있었고, 그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전화기만 보아도 그대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마음이 되어 폰을 쥐기는 했지만, 그것 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나경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저 내리는 비를 또 이겨내려고
길마다 쌓인 기억을 빈 가슴에 담고있지

잿빛 하늘 웃는 네 얼굴 뜀뛰면 닿을것 같은데
너는 이미 비가 되어 내 온몸을 안고있지...]

전화벨 대신에 입력해 둔 김 경호의 [너를 사랑해]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민이겠거니 하고 받아든 폰에서는 한참 말이 없이 숨소리만 전해지고 있었다.
[나야...]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숨소리였다.

"좀 괜찮아진거니?"

"....."

"얼굴 좀 보여주라...."

"......"

"난 니가 보고 싶다....앞이야."

계속해서 말없음으로 일관하는 나경의 의사를 재타진해보지도 않고 기혁은 폰을 내려놓았다.

문들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아픈 기가 역력한 얼굴에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은 그녀의 손끝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여전히 그녀를 떨게 했다.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를 묶는 것을 끝으로 그를 만나기 위한 준비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발끝에 힘이 없었고, 으실 몸이 떨려왔다.
나경은 옷장안에 걸려있는 코트를 걸쳤다.


연신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창가를 올려다보고 있는 기혁의 앞으로 한발 한발 걸어갔다.

"지금도 별로 좋지 않은 거구나..."

"내가 엄살이 좀 심하잖아요...."

희뿌옇게 웃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나경에게 기혁은 조수석의 도어를 열어주었다.

남자 손이라기엔 그의 손가락은 너무나 길어 피아니스트가 되어도 좋을 뻔하다는 말을 했었지.

그를 잊어버리겠다는 오기는 다 어디에 가고, 차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손을 쳐다보는 나경의 가슴이 타들어갈 듯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왜 그래? 아픈거야?"

진정으로 걱정스러워 하는 그의 음성에도 그녀는 터질 지경인 가슴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말간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풍이 느껴지는 원목의 카페에 들어선 기혁은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내주었다.

"고마워요."

"저녁은?"

"입안이 까칠해서 생각이 없어요....그냥 커피나 마실래요."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그는 안심스테이크를 시키고,  커피에 곧잘 갈리아노를 타서 마시곤 하던 것을 잊지 않고 시켜주었다.

"몇 점이라도 먹어봐...."

 미안하단 말 한 마디 해주지 않는 이 남자...또 아프겠지만, 또 절망하게 되겠지만, 그래서 결국 울어버리게 되겠지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기혁은 테이블 위에 설치된 무선 스위치를 눌러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스트레이트로 한잔 더 주시구요. 이 사람 커피도 더 주세요.“

 “과하게 마시는 것 같은데...“

 “술이 완전히 깰 때까지 운전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쫄아 있지 좀 마라.”

조금 전의 긴장했던 기분이나 그를 만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주눅드는 기분이 다 지워지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이면 금방 마주 앉아 다정한 미소를 보내주리라 생각했던 기혁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통상 시간에서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 앞에 얼굴을 드밀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는 정지된 호흡속에서 카페안을 핥듯 살펴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불 속에서 튀어 오르는 시체처럼 벌떡 일어섰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아찔했다.
하지만, 이때 그가 나타났다.
소나기를 한차례 퍼부어낸 하늘처럼..그녀는 이내 환한 표정이 되었다.

"얼굴 표정이 왜 그래?"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가 오히려 걱정된다는 듯이 그가 물어왔다.
나경은 가버린 줄 알았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만 절레 절레 흔들었다.

"내가 좀 늦었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넌 날 참 몰라."

 그는 상대방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긴...서로가 서로를 알기에 우리에겐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지....앞으로는 달라지겠지?"

앞서 한 말에 조금은 당혹해 하던 나경의 표정이 금새 환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말은 이 여자한테는 통하지가 않는군....처음 만났을 때나...시간이 흐른 뒤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게 없어, 이여자....순간순간 변해버리는 세상...순간순간 뒤통수를 치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여잔 얼마나 순수한가.....그래서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는 거지....그래서..이 여자를 사랑하는 거지...

"좀 더 먹으면 좋으련만....."

"미안해요...."

"미안할 것 까지는 없구....좀 걸을까?"

 레스토랑을 나와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는 시간은 열한시가 넘었고, 바닷바람에 비 온 후의 날씨라 바람이 차가웠다.

 “괜찮아요?!“

 기혁이 모래사장에 발을 내딛으면서 발이 헛디뎌 순간 휘청하는 것을 나경이 잽싸게 붙잡아주었다.

 “아, 그정도 마시고 취하다니...나도 다 된 모양이다.“

 “나도 아까 커피에 타서 마신 갈리아노 때문에 머리가 띵해요.“

무안해서 한 말도 아니건만,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기혁은 무안한 자신으 기혁은 무안한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는 나경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지난 날....손을 잡는 것 조차도 의식적으로 피해 오던 날이 있었다.
그녀에게 이렇게 마음놓고....어깨에 팔을 올릴 수 있다니....

한 겨울에나 느낌직한 한기로 온 몸을 부들 떨어대는 그녀를 위해 기혁은 양복 상의를 벗었다.

“괜찮아요.“

“입어...."

"정말 괜찮아요....이렇게 코트까지 입고 있는 걸...."

"그러고도 떨고 있잖아....더 아프면 안되지."

어깨에 양복 상의를 걸쳐주면서 기혁은 살며시 그녀를 껴안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와 있을 수만 있다면...그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하루살이가 되어도 좋다고 늘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에고 잘 어울리시는 분이 여기 또 게시네. 커피 한 잔 팔아줘요.“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끼어드는 노파에게도 여유로운 미소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은 누군가에게 제약을 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주세요.“

 “에고, 시원시원하기도 하지. 그래요, 자고로 남자는 시원시원하고, 화통해야 한다니까..내가 맛있게 타 드드리다.“

 “한잔은 좀 달게 해주세요.“

 돈으로 치면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지만, 그의 손에서 건네지는 커피는 가격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커피 한잔을 받아듦과 동시에 기혁은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작은 흐느낌소리가 파도소리와 어울려 기혁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기혁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았다.

 “너무 잘 울어, 넌.“

 기혁과 나경은 오랫동안 시간감각을 잃어버리고, 모래사장에 다정한 연인이 되어 있었다


정민은 밤새 나경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잠든 시간이 자정을 훌쩍 뛰어넘은 새벽 두시였었다.
한번 빠져버리면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는 집착많은 성격인 나경이 은근히 걱정이 되어 정민은 눈뜨자 마자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나경은 곤하게 아주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아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평온해 보였다.

"음...."

돌아서 나오려던 정민은 그녀가 뿜어내는 여린 신음소리에 다시 돌아서 그녀 얼굴가까이에 다가섰다.
이마를 짚어보니 약간의 미열이 있을뿐인데...여린 신음소리를 뿜어내는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꿈속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나경은 이마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정민아."

 "킥킥...."

 “아침에 이런 내 모습...처음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왜 그렇게 이상하게 웃는 거야?"

“니 모습을 보고 웃는 게 아니라...니 야릇한 신음소리 때문에 웃는 거야.“

“야릇한 신음 소리?“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심상찮았어...닭살 돋는 줄 알았어. 엄청나게 리얼한 꿈이였던 거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 어째 날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데?“

“갖다 부치는 거 또 시작이다.“

“분명 무슨 짓을 하고 있는 듯한 신음소리였다구.“

나경은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면서 발그레하니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사지 하듯이 문질렀다.
잡아 먹을 듯이 노려봤다는 정민의 말이 조금은 과장되긴 했지만, 꿈 속에 젖어들어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꿈이란 것이 그렇듯이 시작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경은 기혁과 함께였다.
도드라진 어깨의 쇄골선에서 목덜미로...그리고, 귓볼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그의 혀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꿈 속이라고 하지만, 그녀 자신을 달아오르게 했다.
혀끝에서의 감촉은 실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얼얼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살이 도톰하게 오른 그의 혓바닥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비록 꿈이었지만,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팔뚝살도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팔을 꺽어대냐?“

두 손을 깍지끼고 머리위로 치켜 올려 등뒤로 팔 근육이 찌리찌리하도록 잡아 땡기는 포즈를 시간날때면 계속하고 있는 나경을 쳐다보면서 덩달아 정민도 깍지낀 팔을 치켜 올렸다.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경은 치켜 들었던 팔을 내려놓았다.

“우와..이렇게 매번 하다보면 정말 팔뚝이 가늘어 지겠는 걸?“

가는 팔뚝을 만들기 위한 체조쯤으로 알고 있는 그 포즈는 가슴..그러니까, 유방의 근육을 긴장시켜 주는 것이었다.

스물 일곱해를 살아오면서 다이어트를 해 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나경의 몸매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녀도 자신의 몸매에 그렇다할 불만사항이 없었다.
기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알몸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경은 그의 손에 의해 가슴이 쥐어졌을 때..처음 알았다.
자신의 가슴이 빈약하다는 것을...

나경은 으아라는 호들갑스런 신음소리를 내면서 등뒤로 팔꺽기를 연속 시도하고 있는 정민을 쳐다보면서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