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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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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18장


BY 어지니 2003-06-23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녀가 올려다본 하늘은 작은 표정 하나 숨길 수 없을 만큼 햇살 맑은 청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경은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앞에 두고서도 한모금 입에 대지 못한채 시간이 좀 더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면서 전부터 이미 눈물 범벅이 되어 누가 보아도 한 눈에 시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슬픔에 쩌린 얼굴로 카페에 앉은 두시간 동안 계속해서 기혁으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오기도 아니었고, 너도 당해봐라는 마음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에게 울먹이는 음성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상처가 너무나도 커 그를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아 도무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7월이라 그런지 저녁 7시가 되었는데도 밖은 훤하니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했다.
눈가의 화장이 다지워질 정도로 울어버린 얼굴로 들어갔다간 정민이 난리법석을 떨것이 분명하다.

그 탓에 나경은 카페에서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좀먹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은 정말 질색이야.

"잘 만나고 왔어? 아니, 나경아!"

제 방보다 나경의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긴 정민은 주인없는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한가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던 차였다.

기혁의 전화가 그다지 썩 반갑지 않다고 말은 했지만, 나경의 표정은 이미 붕 떠서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았었다.

거울을 쳐다보면서 화장을 되 고치는 나경의 얼굴은 어느새 그를 만난 듯 홍조를 띄었고, 설레임이 정민의 손끝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설레임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좋았던 정민은 그녀의 로맨스를 기대하며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랬는데....방으로 한걸음 떼는 것조차 버거운 듯 이를 악물고 들어서는 그녀의 표정은 아까처럼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방으로 들어선 나경은 짧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침대 가까이에 픽하고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얘가 정말 왜 이래? 말을 좀 해...나경아!!"

그리움은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앙금으로 그녀의 삶자체를 퇴폐하게 했었다.
그런 절절한 사랑의 당사자가 내뱉은 가시돋힌 말은 그녀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고, 이렇게 생소한 아픔까지 주고 있었다.

"모르겠어....그냥, 배가 아퍼....숨을 쉴수가 없어...너무 아파."

평소 같으면 배가 아프다는 나경에게 화장실에 가라면서 배시시 웃었겠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식은땀을 주룩 뱉어내며 하복부를 부여잡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나경은 그저 단순히 배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숨을 쉴때마다 날카로운 로프로 조이는 것처럼 쥐어짜는 하복부의 통증은 생리통과는 또 다른 아픔이었다.

"죽을 것 같애...."

"배 좀 아프다고 죽는 사람은 없어. 자, 일어나봐....침대에 좀 누워봐....괜찮아...내가 있잖아. 죽는 일따위는 없어. 죽는 건 아무나 되는 줄 알아?''

갑자기 정민은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경을 알은 후부터는 왠지 모르게 건성적인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늘 말이 없고, 늘 생각이 많은 그녀는 항상 정민을 불안하게 하는 골치거리였다.

침대에 나경을 뉘인 정민은 아주 숙련된 솜씨로 하복부를 조이고 있는 옷부터 벗겨내었다.
여관을 꾸려나오면서 나경은 별의별 일을 다 겪어왔다.
자살을 한답시고, 약을 먹는 것은 다반사였고, 사랑의 배신으로 인질극을 벌여 피바다를 만들어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머니가 심장이 약해진 것도 그 이유였다.
그 뒷처리를 해온 것은 언제나 정민이었다.
그러니, 병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려고 수첩을 뒤적이지 않아도 그녀의 머리에서 떠오른 번호를 손가락으로 바로 찍어내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뒤틀렸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고, 그녀의 팔에는 링거가 꽂혀졌다.

"거봐. 배 좀 아프다고 죽지는 않지?"

"응...."

"아까보다는 좀 괜찮아진 거지? 그지?"

"응..."

"휴우~~다행이다. 넌 어째 잊을 만 하면 이렇게 한번씩 사람 오줌싸게 놀라게 하냐. 응? 이 골통아~~~"

부드럽게 이마를 쓸어주는 정민의 입가에는 그제서야 미소와 함께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괜찮아...너도 좀 쉬어...미안해...주말을 다 망쳐놨어..."

"주말이라고 해봐야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음악이나 듣는거였는데 뭐."

"그래두..."

"미안해 할 거 전혀 없어."

"친구란 거...참 좋아...나 같은 친구만 있으면 좀 피곤하겠지만 말야...."

"좀 피곤하긴 해도 좋을 때가 더 많으니까 걱정 마셔~ 한 숨 자라...."

정민이 방을 나가고 어둠속에서 혼자 남은 나경은 차창밖으로 비쳐지는 네온사인에 시선을 주었지만,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를 찾아낼 수 없었을 뿐...생각만으로도 부대껴 오는 진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끓어올라 가슴안이 데일 정도였다.

하루 하루 그에 대한 추억을 곱씹으며 데인 가슴을 부여안고 밤이면 밤마다 불면의 밤을 보내어 왔다.

작은 우연으로 만나 운명이 되어버린 그 남자와의 다시금 재회했을때...땅바닥에 그대로 박혀버리는 것 같았다.
몸은 달음질쳐 돌아서고 있었지만, 가슴은 이미 그에게 앵겨 있었다.

그러나...오로지 사랑말고는 다른 무엇일 수 없는 그 사람이 내 뱉은 말....그 말은 가슴을 들쑤셔 놓았고, 모든 것을 내팽기고 돌아선 그녀의 사랑은 한 여름날에 쏟아지는 소낙비같은 사랑임을 일깨워주는 듯해 그녀의 가슴을 쓰라림으로 메어왔다.

홀로 자신을 키워온 엄마와 한결같이 여자는 김 나경이라는 이름의 여자밖에 몰랐던 정혼자를 배신하고 돌아선 책임을 빌미로 그에게 굴레를 씌울 생각은 없었다.

잊어야 할 것 같아서...체념해야 할 것 같아서....미련을 버려야 할 것 같아서...
그를 기억 한구석에 접어야 했지만....
인연이 아니었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아픔이 너무나 컸다.

애끓이던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게 자신을 단련시켜왔건만, 지금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오열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생각만으로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아찔했다

그와 관련된 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마음과는 따로 가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멋드러지게 잊어주마. 행복하게 잘 살아라...허벌나게 잘 살아라...

그러나, 그것은 거짓생각이었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생각만으로 끝나는 일이었다.
장 기혁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아마 그녀가 죽어 흙속에 묻히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밖에 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잊니, 체념을 하니 하는 것은 쓸데없는 감정의 소모일 뿐이었다.
그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의잔인한 말은 여전히 가슴의 앙금으로 남아 그녀의 눈물을 짜내게 했다.

여전히 변함없이 해가 떠오르고, 지면서 24시간이 연속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세상 바깥으로 내던져진 것 같이 허전하고 허망해 손끝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슬프게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이 밤마다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녀의 지친 눈물이 더이상 회한으로 남지 않도록....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뿐...그녀를 감동시킬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원농가의 컴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그 일대 컴이 먹통이 되버렸다는 전화에 기혁은 직원을 총동원에 김해 농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기초적인 보안프로그램 하나만 깔아주면 되는 것을 하지 않았던 댓가치고는 그 피해가 너무나 컸다.
한 번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으면 그전에 데이타는 싸그리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을....
후회해봤자, 너무나 때늦은 후회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늘 시간이 지나서야 깨치게 된다.
그러면서 만물의 영장이니 어쩌니 하면서 자신들을 우월시 하며 우쭐되지....
하긴 나도 별 수 없지만....

"어머...이런 장미는 처음 보네요....개량된 건가 봐요?"

"네. 이번에 파스텔 색조로 개량되어 반응이 아주 좋아요"

이제 막 개업을 한 덕분에 그나마 다른 화원에 비해 피해가 조금이라 그런지 여주인의 얼굴이 활짝 핀 장미의 표정과 흡사했다.

"사장님 이 꽃 정말 이쁘지 않아요? 이런 꽃 받으면 정말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아요."

그때까지 컴에 온 신경이 가 있던 기혁은 그제서야 파스텔 색조의 장미를 보았다.

"이거 포장좀 해주세요."

"사장님...우리 모르게 애인이 있었군요. "

애인???그녀의 나의 애인?
그녀가 그 자신의 여자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아주 간절히 기도했었던 불면의 밤이 있었다.
그러나, 정혼자가 있었던 그 시절...그런 생각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모르게라는 말은 좀 그렇고...이 나이에 여자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이거 택배로 보낼 수 있지요?"

"그럼요. ..카드 쓰실거죠?"

"카드요?"

"사장님은...그럼 꽃만 덩그라니 보내실 생각이었어요?"

"......"

여직원은 카드를 받아들고 삼십분째 이름밖에는 쓰지 못하고 선 기혁을 쳐다보면서 킥킥대고 있었다.

"그냥...이쁘게 포장 해서 주십시요...."

"그래요. 택배도 좋지만, 직접 주는 게 더 감동스럽죠."

오랜 경험에서 화원주인은 기혁의 마음을 금새 훔쳐내고 있었다.
연두빛 장미를 숙련된 솜씨로 하트로 모양을 낸 주인은 장미색과 맞물리는 연두칼라로 포장을 하고, 리본을 매달았다.

남자인 자신이 보아도 가슴 설레이게 하는 장미를 안아들은 기혁의 마음은 어느새 그녀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 사장님께서 한턱 쏘나 했는데...혓물만 키고 말았네요."

"하하하...미안합니다. 애인의 화난 마음을 풀어주고 개운한 마음으로 한잔 합시다."

"어머나, 싸우신 거에요?"

"어쩌다보니 그 사람을 화나게 해버리고 말았지 뭡니까....참 쉽지 않은게 사랑인것 같아요."

"참 보기 좋으네요."

"뭐가요?"

"그 분 말씀을 하시는 사장님의 눈빛이 참 따뜻하게 보이거든요."

"하하하. 쑥쓰럽게 왜 이래요."

"아마 그분 화난 마음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에요....제가 장담하건데 분명히 이 선물 마음에 들어하실 거에요."

"그랬으면 정말 좋겠네요...."

그러나, 왠지 예감이 암울했다.
그녀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린 혀를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그녀에게는 크나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제발 이 선물을 받아들고 그 새된 마음을 풀어줘라, 나경아...부탁이다.

따르릉.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장기혁입니다. 나경이 좀 부탁합니다."

"안되겠는데요."

"네?"

"잘 못 들으신 모양인데...안되겠다고 했어요."

"정민씨...나경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기억력 하나는 죽여주게 좋으신 분 여자 마음은 엄청시리 아프게 하시네요. 머리가 좋은 분은 어디가 틀려도 틀려요, 그죠?"

기혁은 노골적인 그녀의 핀잔에 순간 할말을 잃어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폰을 들고만 있었다.

"정민씨...그 말에 할말은 없는데...나경이는 요."

"나경이 죽었어요."

"정민씨!"

기혁은 더이상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것으로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엇따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댁때문에 나경이 죽을만큼 아파서 링거맞고 간신히 잠들었어요."

"얼마나 아프길래...링거를 맞았단겁니까?"

"가는 귀가 먹었어요? 방금 죽을 만큼이라고 말했는데요....나경이한테는 댁한테서 전화왔다는 말도 하지 않을테니 전화 기다리는 일은 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말살스럽던 정민에 의해 일방적으로 끊겨버린 전화에 다시 연결을 시도해보았지만, 헛일이었다.

나경과는 다르게 딱부러지는 그녀가 전화를 기다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바로 실행에 옮겨버린 것이다.

암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그녀의 가슴에 장미를 안겨주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되버렸다.
그래도 그냥 돌아설 수 없어 기혁은 여관안으로 들어서 카운터의 작은 창을 두드렸다.

"어서 오세요. 하루 머물고 가실건가요?"

혼자 여관으로 들어선 기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정민의 모친은 하룻밤 자러온 숙박객이려니 했다.

"안녕하십니까...전 장기혁이라고 합니다. 이거 나경씨한테 좀 전해주십시요."

"나경이한테 직접 주지 그래요? 아프긴 해도 이 꽃 받으면 좋아할텐데...."

"아프다니...다음에 보죠....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직접 그녀의 가슴에 안겨다주고픈 꽃을 카운터에 맡기고 돌아서는 마음이 정말 엿같았다.
그리고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녀의 방 아래 창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가 창아래 선 자신을 보고 한달음에 내려와 가슴에 안겨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 자신의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