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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enter>현실 속으로</font></center></b>
영훈을 닦달 볶아 나경의 핸드폰 번호와 주소를 받아들었지만, 저도 모를 회한의 한숨을 내쉬며 기혁은 그녀의 결혼식장으로 달려갔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애초에 그녀가 결혼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그녀를 사랑하게 되버리는 일생 일대 최악의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코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결혼식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다가 강제로 누군가에게 강탈 당해버린 후의 억울함과 허탈함에 젖어들게 했다.
눈물 대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가슴에 담아질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해도...그녀가 보고 싶었다.
간절한 보고픔에 이끌려 식장으로 들어섰지만, 그녀의 이름은 어디에서고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신부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겨 결혼식을 무기한으로 연기하게 되었다는 안내원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입가에 지어졌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모나고, 남의 불행에 즐거워하는 놈인가 싶어 소름이 끼쳤었지.
"안녕하세요...전...승규 친구인데요...오늘이 승규 결혼식이라....식장에 왔는데...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요..."
그녀로부터는 그 어떤 연락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는 암울한 예지가 뇌리에 꽂히면서 가증스럽게도 기혁은 친구를 가장해 승규의 집에 전화를 걸었었다.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어 말을 버벅거렸었지.
"세상에...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승규 모친의 한탄을 시작으로 기혁은 나경이 결혼을 파기하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기다렸다.
결혼을 파기한 모든 원인이 자신이었음으로...자신에게로 달려오리라 믿으며 기다렸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고, 일년이라는 시간만 무심하게 휘리릭 지나가버렸다.
믿고 기다리던 마음이 너 아니면 여자가 없냐는 식으로 오기 섞인 뿔 달린 감정으로 변해갔다.
뭐, 아주 가끔...비가 올 때면...혹여나 또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청승을 떨어대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었지..
그리고, 또..뭐, 아주 가끔은...너무 진하게 달게 마시는 그녀의 커피 스타일이 떠올라...살은 찌지 않아도 그렇게 달게 마시는 것은 좋지 않을텐데..지금도 그러고 있나...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었지...
물론, 그렇다하게 사귀는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간신히 궤도를 오를 차에 있는 사업의 기반을 더 신경 써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일년이란 시간은 그녀에 대한 감정을 무디게 했고, 김 나경이란 여자는 그렇게 시간에 묻혀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던 차였다.
그렇게 잊혀지고, 무뎌진 여자였는데...이 아스라한 감정은 무어란 말인가...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있는 작은 쪽지를 쳐다보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기 시작하는 한줄기 바람에 당혹감을 숨기기 위한 제스쳐로 기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따르릉.
"나경아. 니 전화잖아."
"응? 그러네...난 너 말곤 전화 올 때도 없는데..."
"어쨌든 니 핸드폰이잖아.."
핸드폰을 소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민의 생각이었다.
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도 정민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것 인줄 알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나경은 연신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네, 김 나경입니다."
기혁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안이 콱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설레임도 아니고, 가슴 두근거림도 아닌,....그저 답답하고, 그저 막막한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낯선 느낌에 기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뭐, 그저...조금은 가슴이 설레이지 않을까...
아니면..전혀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이 답답하고...이 막막한...이 아스라함은 무어란 말인가.
"여보세요?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변하지 않은 음성으로 묵묵히 말없는 상대방에 대답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책을 출판할 계획은 없지만, 글쓰는 것이 너무나 좋아 곧잘 밤을 새운다더니 왜 글쓰기 작업은 그 만두었냐고.....그리고, 커피와 술은 좀 줄였냐구...아픈 데는 없는지...
아니, 아니, 그따윗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한걸음 다가서면 꼭 그만큼 뒤로 물러서면서 그렇게 자신을 거부하면서 현실을 부각시키더니만 왜 결혼을 파기했느냐고.....
자신을 이유로 결혼을 파기했으면 왜 지금까지 연락을 두절한 채로 살고 있느냐고...
아직도 장 기혁이라는 남자를 기억이나 하고 있냐고...아직도 가슴에 기혁이라는 남자의 존재가 남아있는지....묻고 싶었다.
정말 알고 싶었다.
그러나, 기혁은 바보처럼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말았다.
정면도전을 하는 평소 그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녀 앞에 나선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저 회사 정문을 나서고 있는 그녀를 먼발치서 지켜보았다.
짧은 커터머리에서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말고는 일년전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야윈 듯 마른 몸...알통 없이 잘 빠진 종아리...걸을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습성까지도 일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말 변한 것이 없어도 어떻게 저렇게 없냐....
그렇게 변한 것이라곤 없는 그녀가 얼마 전 횡단보도에서 함께였던 여자와 회사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즐거움이란 즐거움은 그녀의 얼굴에서 다 베어난 듯한 밝은 얼굴이었다.
"얼른 가...이러다 너 늦어."
"넌?"
"김 경호 테이프를 사야해...늘어나서 이제 더는 듣기가 좀 그렇거든....테이프만 사고 곧장 집으로 갈거야."
"가서 얼굴만 내밀고 나도 집으로 바로 올게."
"그러지 마. 너 그러다 친구사이에서 왕따 된다. 왕따되는 거 그거 시간문제도 아니야...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재미나게 놀아..."
한 달에 한번 있는 모임에 참가하는 정민의 마음은 그다지 개운치가 않았다.
가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나경을 혼자 둔다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입가에 머문 미소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입가 가득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금새 눈물을 뚜둑 흘려버리는 그녀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우연히 기혁을 만나고 나서부터라는 것을 정민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정민이 탄 버스가 나경의 시야에서 멀어지자 마자, 기혁은 어이가 없어 그만 허하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쩜 저럴 수 있나싶게 순간적으로 그늘져버리는 나경의 얼굴을 반대편 도로에서 보고 있던 기혁의 가슴은 엉그러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뭘 떨어뜨린 것처럼, 땅바닥을 지켜보는 나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기혁은 그녀의 뒤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레코드 가게였다.
잠시 후, 그녀의 손에는 작은 케이스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김 경호의 CD였다.
기혁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그를 닮아가고 있었다.
기억하건데, 티눈이 잘 생기는 이상체질 때문에,그녀는 걷는 것을 그다지 즐겨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종아리가 빳빳하게 굳을 정도로 걷고 있었다.
회사 정문에서 레코드 가게까지 40분은 족히 될만한 거리였고, 다시 레코드가게에서 그녀의 집까지가 그에 상응하는 거리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던 나경은 대문 앞에서 두어번 짧은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대문이 열리자 나경은 의식적으로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을 훅하고 날려버렸다.
가면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은 정말 질색이다.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아무래도 순수한 그녀의 표정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속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간 그녀가 이층으로 갔는지 방에 불이 켜지고 엷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들어서 볼 때, 엷은 소리였지만, 안에서는 상당한 소리로 귓가를 맴돌 것 같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안도된다기 보다 기혁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파고 있었다..
<font color=#ff33ff><b><center>뜨악! 경악해하는 그녀</font></b></center>
"나경아!"
"깜짝이야, 왜 그래. 너...없는 애도 떨어지겠다."
"저 사람...그 때, 그 엉덩이 아냐??"
"뭐?!"
"그 85점짜리 엉덩이 말야."
모두들 퇴근하고 정민과 여유롭게 커피 타임을 즐기고 있던 나경은 하마터면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무, 무슨 말이야...그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오겠어..."
나경은 갑자기 말을 버벅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이라니까. 응? 어디 갔지??? 분명히 저기 서 있었는데.."
그럼, 그렇지...그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오겠어....
"정말이라니까. 너, 내 시력이 양쪽 다 2.0 이란 거 알잖아. 분명히 저기 서서는 이쪽 사무실을 쳐다보고 있었다니까."
"너 시력 좋은 거야 인정하지.....하지만, 그 때 그렇게 한 번 본 기혁씨 얼굴이니....착각할 수도 있어..."
정민에겐 웃음띤 얼굴로 착각이라고 말했지만, 착각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가슴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 사람을 만나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사랑이란 것을 느끼면서도 착각이라고 생각했어.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그리고, 그 착각이 결코 현실로 이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기혁이라는 이름이 소용돌이 치듯이 가슴을 돌기 시작하면서 여유롭게 커피 타임을 즐기기엔 다 그른 것 같았다.
"그 사람이야. 틀림없다고 했잖아, 분명히 봤다구! 야, 어떻게 일루 오고 있어. 가까이서 보니까 엉덩이가 정말 이쁜걸. 10점 플라스야~"
정민이 더 흥분해 소리높여 말했다가 귀엣말로 했다가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나경은 그대로 땅바닥에 꽂혀버린 것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틀림없었다.
장 기혁이 틀림없었다.
머릿결사이로 스치는 바람처럼 그냥 스쳐버릴 기세로 걸어오던 그가 숨소리마저 확연히 들릴만한 거리로 다가서고 있었다.
"우리 할 얘기가 남았던 것 같은데..."
비음섞인 허스키한 음성만큼은 그대로인 기혁이 말했지만, 나경은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바르르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을 뿐..아무 말도...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가 없었다.
"나경아...."
기혁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정민으로서는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지금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보내줄테니까요..."
아주 정중하게 인사까지 하는 기혁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타"
조수석 도어를 여는 기혁을 쳐다보면서 미동 조차도 하지 않는 나경의 옆으로 다가선 정민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었다.
"응? 응....괜찮아...괜찮아...오늘은 너 혼자 먼저...집에 가야겠다..."
정민은 말도 더듬더듬, 움직임도 더듬더듬거리면서 조수석에 올라타는 나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안전벨트 매야지!"
에구, 깜짝이야.
나경이 조수석에 올라타 다리를 가지런히 모을 새도 없이 기혁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민에게는 아주 예의바른 언사에 정중한 태도를 보이던 그가 차에 오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고, 급시동을 걸면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쳐다본 그의 얼굴에선 차가운 냉기가 흐르다 못해 얼음되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차가움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나경은 그의 차가 시내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당신은 나한테 한마디 말도 해주지 않았어...."
"네? 뭘요?"
"한 마디 말도 없어 사라져 버렸잖아...."
"그건...그거하고는 다른 문제예요.....너무 멀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르다고 생각하다니...어이가 없군."
언제나 늘 가슴속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그였지만, 역시 아직은 그를 만날 때가 아니었다.
툭툭 내뱉듯이 말하는 기혁의 태도에 움츠려 들어있던 나경은 갑자기 돌발적인 행동을 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호대기 상태로 차가 잠시 멈추어 서자, 안전벨트를 풀고 차 도어를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지만, 기혁이 더 빨리 그녀의 어깨를 아프게 잡았다.
"야! 성질 건드리지 마!"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에도 기혁은 다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시금 그녀 스스로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기혁은 조수석 쪽 도어를 열 수 없도록 운전자 쪽에서 도어를 잠궈버렸다.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차를 세운 곳은 죽성이었다.
"내려"
"차를 이렇게 대면 어떻게 내려요? 차 문이 열리지 않잖아요."
이미 주차한 차와 너무 가까이 세우는 바람에 도어를 열 수가 없었다.
"저런...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차 주차할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날 거쳐서 내려야겠는데...어쩐다??"
만나자마자, 신경질적이더니 비앙양거리기까지 하면서 사람의 속을 긁어놓고 있는 그를 노려보다 울컥 눈물이 치솟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지난 일년동안 당신이란 여자 때문에 밤 잠 못 자고 속 쓰려했던 것..꼭 그만큼 되돌려줄 기회가 앞으로 많을테지......내려,"
이유야 어쨌든 사랑이라는 감정을 일게 했던 여자를 행해 속내와는 다른 말을 찌꺼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섬찟함에 가까운 짜릿함을 숨기기 위한 포장에 지나지 않았다.
고요한 섬 마을 죽성은 일 년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포장 안에서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아줌마들이 일년전의 그 아줌마들인지 확실하지 않았을 뿐, 천장에 끈을 매달려있는 녹슨 병따개까지 그대로였다.
"어서 오세요. 뭘로 드릴까요??"
엉덩이를 부치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가선 중년여자에게 기혁은 나경을 대할 때와는 달리 다정한 표정에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장어 주세요. 소주 한 병 하구요. 아, 장어 꼬리부분은 뻬 주세요."
"네??"
"장어 꼬리부분은 빼 달라구요. 이 사람이 놀래거든요."
"!..."
치맛자락을 무릎 아래로 끌어내리던 나경은 아주 사소한 것을 기억해내던 기혁을 쳐다보았다.
그랬었다.
불판 위에 올려진 장어는 토박난 주제에도 심학 꿈틀거렸고, 나경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 앉았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기혁은 양념장에 장어를 묻혀 불에 올려놓는 일을 반복했고, 나경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하면서도 무릎 위를 드러내고 있는 다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참 알 수가 없다니깐...보여주고 싶어서 입었을텐데, 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냐? 이걸로 덮어."
"이렇게 뜬금없이 뜬금없이 찾아온 사람은 기혁씨였어요."
볼멘 그녀의 음성에 별 대꾸 없이 기혁은 소주잔에 술을 따라 거푸 마셔대었다.
"과하게 마시는 것 같아요."
"뭐가 걱정이야? 사실은 그게 걱정되는게 아니면서...말을 돌려서 하는 것은 여전하군."
"운전중이잖아요."
"그래서?"
"그래서라고 묻다니...어쩜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변하지 않은 건 당신 쪽이지. 난 많이 변했어. 예전엔 그런대로 잘 참았는데, 이젠 그렇지도 못할 뿐더러 그럴 생각 자체도 안 해."
"경고성이로군요."
"오호! 안 본 새 똑똑해지셨군."
"빈정거리지 좀 말아요."
"그러지 않기를 원한다면 날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잠깐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견딜 수 없어 나경은 소주잔을 집어들었다.
목안으로 싸아하고 퍼지는 술기운이 썩 유쾌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날 이렇게 마셔버리면 취하게 될 거라는 것을 나경은 알았지만, 거푸 소주잔을 들이켰다.
첫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나경은 나경은 두 잔째 잔을 비웠다.
"술은 즐기면서 마시는 거야...타기 전에 먹어."
"먹어요..먹는다구요...먹을 거예요."
입구쪽에 앉아 바다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는 나경의 손끝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기혁은 놓치지 않았다.
"일어나,."
"네?"
"일어나 이쪽으로 와서 앉으면...덜 추울거야."
"....."
"무조건적으로 지금 모습 그대로 돌려 보내줄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그렇게 감동할 건 없어..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리로 오지도 않았어."
술이 확 깨는 말을 하는 기혁을 쳐다보던 나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기혁을 경계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든 느낌하나에 가족은 물론이고, 결혼까지 무효화 시켜버린 자신이었다.
그리고, 마주앉은 이 남자가 그 장본인이었다.
"그러네요. 정말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난 기혁씨 겁 안내요."
"겁낼 이유가 없다....그만큼 심장이 탄탄해졌다는 말이군.....좋아. 좋은 현상이야....김 나경의 쿠데타라...하하하...나경아..."
꿀꺽...
탄탄해졌니, 쿠데타니 어쩌니 하면서 하하하 실없이 웃던 그가 웃음을 멈추고, 잔뜩 목소리를 깔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경아...나 때문에 결혼을 파기한 것이라면...왜 나한테..이제껏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어이없고, 기막히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나경은 그러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파기한 이유...물론, 기혁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치도록, 가슴에 에이도록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쉬운 결정은 아니였었다.
그랬는데, 가슴에 이는 변화를 막지 못하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만 것이다.
기혁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또 언제 가슴에 새로운 바람이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런 예고없이 불현듯 찾아든 기혁에 대한 사랑처럼....
또 다시 그런 사랑에 젖어들어 흔들리게 될까봐서 나경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그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는 ...너무나 그리워 기혁 없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 그를 찾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만물의 영장이니 어쩌니 하면서 떠들어대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버리면 망각의 늪으로 빠져버리는 기억의 울타리에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들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중요하지 않아 아무렇게나 버린 쪽지를 찾는 사람처럼 희미한 기억을 들췄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지만, 전화번호 하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웠다.
안타까움에 가슴은 숯검정이 되어버렸다.
자신을 전혀 다른 인생의 길로 접어들게 한 사람이었지만, 망각이란 것은 예외없이 적용되어 유일하게 알던 그의 핸드폰 번호마저도 잊어버리게 했다.
나경은 아무 말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