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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5장


BY 어지니 2003-06-23

 애써 기혁으로 향하는 느낌을 누구에게서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며 중얼거리면서 나경은 대화방으로 들어섰다.

 나름대로는 자신을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기혁에게서 느껴졌던 짜릿하고도 전율이 가미된 느낌을 누구에게서나 흔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며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나경에게로 뻔한 질문이 쏟아졌다.
 나경의 나이를 물어오고, 나경의 이름을 물어오고,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등...
그리고, 느낌이 좋다는 뻔한 말을 시작으로 진지하고도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대화가 모니터 화면을 통해 전해졌다.

 나경은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기혁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두려움에 나경은 미안하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대화방을 나와버렸다.

 기혁에게서 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화내고, 상처받는 등의 느낌이란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에게든 쉽사리 느껴지기를 바랬었지만, 기혁을 향하는 느낌은 장 기혁이라는 남자에게서만 느껴지는....결코 흔하게, 쉽사리 일어날 수 없다는 것만 재차 확인하는 꼴이 되버린 것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절망을 주었다.


 "나경아! 우리 신랑 출장갔다!"

 출장간 신랑 덕분에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며 너스레를 떨어대는 지영의 얼굴은 함박꽃 그 자체였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내 얼굴이 어때서? 화장이라도 뭉쳤니?"

 "아니, 그런 게 아니구...하늘에 있어야 할 먹구름이 니 얼굴에 잔뜩 깔렸잖아."

 "결혼 전에는 다 그렇타메.."

 "아직도 그런 거야? 승규씬 너 이렇게 심란해 하는 거 알아?"

 "그 사람은....늘 바빠..."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합리화에 불과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와 승규가 시간을 송두리째 자신에게 할애 한다고 해도 이미 기혁에게로 돌아선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는 것을....


 정신건강을 위해서 아이쇼핑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억지이론을 펼치는 지영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전자제품 코너였다.

 "저 노래 좋지 않니?"

 지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한창 유행하고 있는 뮤직 비디오였다.

 "저 여자...정말 좋겠어...나도 저 여자처럼 손가락 두어개 잘라 내는 것으로..내 마음대로, 내 느낌대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신체 일부를 절단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과감하게 저버릴 수 있는 여자의 이기심과 결단력이 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어? 무슨 말?"

 "방금 그랬잖아. 손가락을 잘라내더라도 니 마음대로, 느끼는 대로 사랑하고 싶다고...."

 "그냥....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헛말이 나온 거지, 뭐..."

 "결혼이란 걸 구속이라고만 생각하지 마...그렇게 생각하면 복잡하기만 해...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하면...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니?"

 친구의 지극히 이성적이고, 바른 생각이 왜 빈정거리는 투로 들리는 것인지...그래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나온 것일까, 나경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경의 기분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친구는 소나기처럼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워 했다.

 "너...왜 그래? 괜찮은 거야?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지영은 자신의 말이 수치와 모멸감을 덮어 씌웠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아냐..."

 왜그러냐면서 울고 있는 나경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친구에게 얼굴을 내보이는 것조차도 부끄럽고, 창피해서 나경은 얼굴을 돌려버렸다.

 한낱 지나가는 바람의 사랑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흔들리고 삐딱하게 서 있는 정신머리를 쥐어 뜯으면서도 뮤직 비디오에 나오는 여자의 이기심이 눈물나게 부러운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왜 자신은 그 여자처럼 해버릴 수 없는 것일까...
뒤늦게 가슴을 파고드는 사랑에게로 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머뭇머뭇..갈팡질팡 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또 다른 사랑이었다!

 자신에게 쏘여질 사람들의 질타어린 시선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딸로서 어머니를 향하는 사랑...기혁에게 향하는 사랑과는 비록 다른 느낌이지만, 8년을 한결같이 자신만을 바라봐 온 승규의 사랑.....

 내 머리와 내 가슴은 분명히 내게 한 몸인데...어째서 이렇게 연결이 안되고 있는걸까?

 쇼윈도를 통해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는 자신의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다.
쇼윈도우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조차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음!

 기혁을 만나게 된 것은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일생 일대의 사건으로 그녀의 숨통을 죄어 오고 있었다.

 기혁에 대한 서운함과 야속함으로,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한심함으로 얼마나 울었던지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음 날이 일요일이였길래 망정이지...평일이었으면 나경은 지각을 면치는 못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대에 버스를 타지 않으면, 지각으로 이어져 시말서까지 써야 하는 꽉꽉 짜여진 틀에 접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 일주일에 서너번쯤 있으면 좋을텐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주는 일요일 아침...
 얼마나 뒤척거렸던지 나경의 머리카락은 까치집을 연상케 할 만큼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침대에서 내려온 나경은 모닝커피를 마셔야 했다.

 비실 비실...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머그컵 가득 진한 갈색의 커피를 들고, 나경은 베란다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뿌려질 것 같은 하늘은 온통 우울한 회색으로 뒤덮혀 있었다.

 회색 하늘은 기혁을 생각하는 나경의 마음이었다.
눈에 부신 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이고 싶지만, 그녀에게 있어 기혁은 어쩔 수 없이 회색하늘 일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또 다시 눈물이 주룩...

 다시 한 잔의 커피를 준비해 방으로 들어온 나경은 습관처럼 컴의 전원을 켰고, 메일이 와 있다는 메시지에 따라 편지읽기를 클릭했다.

 장 기혁이란 이름이 떠억하니 버티고 있는 메일을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도 깨어있는 이성은 이제 더 이상 그와 어떤 식으로든지 접촉을 삼가야 한다는 경고성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이미 메일 확인을 누르고 있었다.

 <진정이란 이렇게 힘이 드는 건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뒤돌아보게 되는 것인지...무슨 의미로 지켜준다는 말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어쨌든 지켜준다고 했으니 말없이 돌아서야겠지... 분수를 알아야 했었는데...그런데도 왜 이렇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나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결코 상처주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고..늘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라도 끝나버릴 수 있다니...얼마나 다행이야...그래....김 나경...잇쯤에서 끝내는 거야...그래, 다행인 거야.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위약효과에 지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미안해요...생각해보면 그렇게 흥분할 일도 아니였을 뿐더러, 그럴 만한 자격도 없는데..내가 너무 주제넘었어요. 컴 안의 세상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려니 생각하고, 이해해줘요...그리고, 행복하세요.>

 그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과는 360도 틀린 말을 메일로 보낸 나경은 결혼을 앞두고 이 남자를 믿고 한 평생을 살아도 되는 것일까 생각했었다던 지영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된다면...아니, 이미 그러기 시작했다면..어쩌지? 어떡하지?"

 승규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만...딱 오늘 하루만 생각하고, 이제 잊어버리는 거야. 가슴속에서 장 기혁이라는 남자를 먼지 털어내듯이 털어내 버리는 거야... 저 속의 세계는 처음부터 내 세상이 아니었던 거야...

 따르릉...

 "으음..여보세요..여보세요?"

 "우는 거야?"

 누구라며 자신을 밝히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는 기혁의 목소리....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아도 이렇듯 들뜰 수 있는 눈물같은 행복을 주는 그의 목소리...

 그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고,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울지마...당신이 울면...내 가슴이 아파..."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요...가슴까지 아픈 사람이 나와 대화를 하다 다른 사람과 일대일을 했다는 말이예요?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 자체도 어이가 없어..아, 미안해요...이러지 않기로 해놓구선..."

 왜 이 사람에게는 의지라는 것이 들이먹히지 않는 거야!

 그를 향해 치솟기 시작한 어리석은 욕심 때문에 스스로 깨지고,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꼬집어 뜯으면서 앙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혁은 핸드폰으로 전해지는 나경의 울음소리에 당황했다,
이런 저런 하소연을 늘어놓으면서 짜대는 여자가 있기는 했지만, 온전히 자신을 이유로 울어대는 여자는 이제껏 없었다.

 기혁의 가슴도 그녀와 똑같이 아려왔다.

 만나고 싶다는 처음 생각은 솔직히 호기심이 시발점이었지만, 자기 때문에 울어버리는 이 여자..종종 실없이 자신을 웃게 하는 이 여자...기혁은 그녀를 정말 만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