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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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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소리


BY 오늘풍경 2019-12-03

어제 아침 현관문을 여는데 바깥쪽 손잡이에 뭔가 묵직한 것이 걸려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종이봉투 속에 스무 알 정도의 귤들이 들어 있었다.
봉투의 겉에 보라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어서 내용을 확인하니,

-아래층 202호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 둘이 있어서 시끄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최대한 조심시키며 살겠습니다. 많지 않은 양이지만 맛있게 드세요-

이렇게 써 있었다.
안 그래도 그들이 이사 온 후 계단 내려가는 길에 빼꼼히 열린 틈으로 우연히 보니 5,6살짜리 아이들이 신을 법한 신발들이 보여서 애들 있는 집이 이사왔구나 싶었다.

시끄러우면 얼마나 시끄러울려고...아이들 웃음소리, 재잘거리는 소리, 뛰어노는 소리 들리면 이 참에 아이들 기 좀 받지 뭐.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젯밤, 새벽 한 시 경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눈을 떴다가 다시 자기 위해 누웠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겨울이라 창문들을 서로 서로 꼭꼭 닫아 둔 상태임에도 들렸다. 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매우 작게, 미세하게 들렸다. 환청인가 싶을 정도로 불확실한 소리여서 귀의 감각에 집중해서 자세히 들어보니 신생아의 간절하고 절박한 울음소리가 맞았다. 새벽에 잠에서 깬 아이가 울어대서 부모가 잠을 설친다는 얘기는 익히 많이 들었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짐짓 속으로 놀랐다.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저 울음의 의미와 어느 선까지 부모가 달랠 수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중에 참으로 길게, 오래도록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러다 스르르 잠으로 빠지면 다행인데 잠이 오질 않아서 스르르 상념에 빠진다.
내가 아기였을 때도 저렇게 울어댔을까 싶은.
배가 고픈건지,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건지, 밤 새 성장하느라 아파서 우는건지...
내가 최근에 울었던 기억이 났다.

애청하는 프로인 '유퀴즈 언더블럭'에서 50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아저씨의 사연이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외삼촌이 하는 세탁소에서 일을 배워 지금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돈을 벌면 대부분을 동생들이 있는 고향에 보내야해서 배를 많이 곯았다고 한다. 5일 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어느 날 길에서 대추 한 알을 주웠는데 목구멍이 딱 붙어 버렸는지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면서 눈물 지었다. 이제 둘째 아들애가 취업을 하면 캠핑카 하나 사서 여기저기 여행하며 살고 싶다는 아저씨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딸과 아들이 들어와서 퀴즈를 풀지 못한 아버지를 위로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들의 말이 나를 울렸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어요"

제대로 교육 받지 않았고, 부유하게 살지도 않았고, 자주 서 있는 곳의 시멘트 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로 고된 노동의 삶의 살아온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다는 의미속에 담긴, 아버지의 성실,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 아버지의 삶에 대한 끈기와 인내를 배우고 싶은  아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말이어서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들렸다. 아, 저 아저씨는 참으로 인생을 잘 살았구나 싶어서 뭉클했다. 그렇게 울 기회가 주워지면 나는 조금 울지 않고 아주 실컷 울어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 역시 눈물이 아닌 '울음'의 기억이다.

아주 오래 전, 방송을 통해  중증장애시설에 버려진 아이 태호의 사연이 나왔었다. 장애시설의 원장스님의 말에 의하면 가제손수건 한 장으로 다 덮어질만한 사이즈의 아이가 시설 앞에 버려졌는데 팔이 없었고, 다리가 있으나 너무 짧아서 평생 걷기 힘든 아이였다고 한다.  발가락이 채 열 개가 되지 않았다. 방송에 나왔을 때 나이가 한 5,6살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이동은 누워서 몸을 굴려서 하고, 밥도 발가락으로, 양치도 발가락으로 하는 아이였는데 말은 곧잘 했다. 그 곧잘 하는 수준이 너무 어른스러웠다.

다른 사람과 몸이 다르게 생겨서 속상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괜찮아요"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라고 묻자 "아빠요"
왜요? 라고 묻자 "아빠는 운전을 하니까요. 저도 운전하고 싶어요" 하면서 발을 들어 핸들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 무렵 나는 직장을 그만 두고 쉬고 있을 때여서 태호가 있는 시설에 자원봉사 신청을 하고 대기가 풀리길 기다렸다가 태호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용기가 났었는지, 아니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었다. 그 곳에는 태호처럼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다운증후군 아이들, 지체장애,  지적장애, 뇌성마비, 뇌병변 아이들....

나는 그 곳에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 목욕도 시키고, 밥을 먹여주기도 했다. 원장스님이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태호와 일대일 수업을 하도록 해 주셨다. 숫자와 한글을 스티커 붙이기를 통해 배워나가는 수업을 했는데 태호는 내가 대신 스티커를 떼서 붙이도록 두지 않았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자기가 하겠다고...스티커의 한 쪽을 조금만 떼어주면  발가락을 이용해 힘겹게 떼어서 정답의 위치에 갖다대고 발바닥으로 야무지게 딱딱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나는 참 이상하게도....태호 앞에 뭔가 아주 많이 부끄러워졌다. 태호가 모자라고 부족한 나를 받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나는 성인이고 어른이고 사지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태호가 나를 먼저 캐치한 것 같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아버려서 배려할 건 하고, 무시할 건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3개월간 다녔는지, 6개월간 다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한 때의 일이지만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나는 그곳을 다녀 온 날이면 어김없이 천정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오열하듯 울었다. 제어가 잘 안되는 울음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사유'는 어디로 가고, 감정만이 오롯이 차 올라서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주 많이 목놓아 울었다.

울음..눈물..그리고 슬픔으로 이어지는 상념에 빠져들다가 세월호 사건이 난 후  어느 토요일 오후 안산 단원구까지 홀로 가서 큰 운동장을 촘촘히 매운 사람들 틈에 끼어 대여섯 시간의 분향 순서를 기다렸다가 마주한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보고 깊은 슬픔에 빠졌었던 일까지 떠올랐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고 무렵의 아이들이 지을 수 있을 해맑음 보고 얼마나 울고 울었는지...

아래층 간난아이의 울음이 서서히 그쳐갈 무렵, 나도 더 이상의 회상을 멈추고 잠을 청했다.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래층 가족들, 그리고 아이들. 특히나 간난쟁이로 추정되는 그 아이. 그 아이가 아장아장 잘 걸을 때 즈음이면 내가 이사를 가겠지만 어여 날이 풀려서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바깥에서 자주 만나게 되길 바란다. 덜 슬프고 덜 아픈 아이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자주 잡아주고 싶다.